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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Oct 11. 2024

한강이 온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부쳐


일 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친구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던 도중 한 친구가 "어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했다"라고 말해서 우리는 모두 놀랐다.


말로만 듣던 노벨문학상!

그것도 고은이나 황석영이나 조정래가 아니라 한강이라니!


우리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주로 그녀의 소설의 작품성에 기초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탁월한 번역과 K컬처의 역량에서 비롯됐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오늘날처럼 높아지지 않았다면 또 번역의 전문성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다면 한강이 노벨상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에 더하여, 나는 이미 한강이 앞길을 터놓았으므로 앞으로 5년 내외로 또다시 고은이나 황석영 또는 다른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헛소리까지 했다. 그저 나의 소박한 바람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녀의 작품의 위엄이,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질 수도 있었던 한글의 우수성이 새롭게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거 보수 정부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하는 한강의 소설 중 다행히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과거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큰 화제가 되었던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 나는 그녀가 아름다움과는 매우 멀어 보이는, 인간의 극단적인 상태를 지나치게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서, 어찌 보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받았다.


수년 후에 [소년이 온다]를 듣고 또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냉정하고 차분한 서술과 묘사에 감탄했다. 그때 나는 한 단톡방에서 영화 [택시운전사]와 광주항쟁을 취재했던 힌츠페터를 소개하면서 이 소설을 인용했다. 아래 그 부분을 인용하여 다시 소개한다.




몇 달 전에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년 출간)를 ‘들었다.’

그 책을 내 눈으로 읽은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오디오북으로 들었다는 말이다. (이후 한국 책이 별로 많지도 않은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빌려서 다시 검토했다.)


그 소설은 15세 소년이 목격하고 경험한 광주항쟁을 찬찬히 풀어쓴 것이다. 한강은 광주항쟁 당시 15세였던 문재학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아서 ‘소년은 온다’를 썼다. 


그 소설에서 한강은 광주항쟁 중 계엄군에 의해 사살된 시신들이 관에 담겨 늘어선 광경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다. 계엄군의 총에 아들이 맞았을 것이라고 믿고 시신을 찾아 헤매는 가족, 울부짖다가 이윽고 마른 목으로 끅끅거리는 어머니, 태극기로 뒤덮은 허름한 급조된 목관들, 그러나 밀려드는 시신들로 인해 더러는 관조차 미처 준비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누워 있는 시신들. 수일째 날이 더워서 썩은 내 풍기는 시신에 이르기까지, 한강은 마치 눈앞에 보고 냄새를 맡는 듯 사실적으로 냉정하게 이 광경을 묘사했다.


그것은 한강의 특징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에서도 그런 것처럼 한강은 ‘그로테스크하다’ 할 정도로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상황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술한다. 나는 때때로 그의 글이 너무 정직하고 치밀해서, 그래서 나조차 그 광경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듯 느껴져서 몸서리친다.


“발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들은 외상이 없어 깨끗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강 덩어리들처럼 굵고 거무스레해졌다.”


너무 놀라워서 눈을 감고 싶을 정도다. 누워있는 시신의 맨발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해서 말이다. 1970년에 태어난 한강은 어떻게 그 광경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중학생 나이에 불과한 한 소년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한강은 그의 시선으로 보는 대로, 그의 감정이 느껴지는 대로 광주항쟁 과정을 묘사했다. 너무나 정직하고 정밀하고 차분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의 글을 들으면서 나는 전율했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직후 노먼 소프 기자가 촬영한 한 사진에는 시민군의 일원이었던 문재학이 엎드려 있었다. 그 옆에 동갑내기 친구인 안종필도 누운 채 나란히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도청에서 나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가 총에 맞은 시민군들이었다.


노먼 소프 기자는 진압 직후인 5월 27일 아침 7시 30분에 언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청에 들어가 계엄군이 미처 정리하기 전에 내부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때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은 아마 섬광탄을 맞아서 그렇게 된 듯 불에 탄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인구가 사십 만이었던 도시로 가는 군인들에게 80만 발이나 되는 탄환이 지급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1980년 5월 군부는 광주를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114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도청 민원실 부탁합니다. 안내받은 전화번호를 누르고 다시 기다렸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 걸 봤는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떨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어떻게 벌써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얼마나 됐다고,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습니까.”(p.69)


어떻게 벌써 그럴 수 있냐니.

그렇다면 그 “벌써”는 언제여야 하는가.

그로부터 42년이나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정말 많이 발전했고, 발전했고… 발전했다.


그러니, 혹시 그 “벌써”는 벌써 지나갔던 것일까.

나는 해외에 있어서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수많은 격변이 발생하고, 이미 무디어지고 무감각해지고 결국 무관심해져 버린 5.18 트라우마. 너무 많이 들어서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은 광주 5.18.


그런데, ‘세월호’ 사건도 그렇지만, 그렇게 지겹게 들은 것 같아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너무 많이 들어서 헷갈리는 건가.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늙어서 그런가.


아, 무심한 세월!

케케묵은 해방과 혁명의 시대는 우리의 젊음과 함께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아니면 항상 그랬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

또다시 아집과 탐욕과 위선과 반목의 시대는 여전하다.

(2022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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