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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강원도 영월 - 홍길동의 실존에 관한 고찰

2024년 가을 중부지방 여행 이야기

by memory 최호인 Feb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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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삿갓 생가와 묘역을 아주 빠르게 훑어보고 나온 (너무 빨리 다녀서 뭘 보았는지 헷갈릴 지경인) 우리는 차로 가서 이제 어디로 갈지를 논의했다. 아니, 우리가 논의했다기보다 재관과 혁국이 대화했다. 상국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으니까. 혁국과의 여행에서 그가 갈 곳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또는 불확실한 채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 해.”

운전대를 잡은 혁국이 말했다.


"태백산이 근처에 있네. 거기 가보자."

재관은 태백산으로 가자고 말했는데, 혁국은 단박에 거절했다.

“사방에 보이는 게 온통 산인데, 뭘 또 어느 산으로 가자고 하냐.”


우리 가운데 강원도 산골로 들어와서도 굳이 또 산으로 가자는 재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태백산이 나름대로 특별한 상징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겠지만, 재관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굳이 태백산으로 가자고 재관은 재차 주장했는데…


나중에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재관은 어쩌면 태백산 정상에 있는 천제단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태백산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 신산으로 섬겨졌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천제단을 두고 개천절이면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하늘에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만약 재관이 그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태백산 정상으로 가자고 했다면 나도 동의했을지 모른다. 물론 가봐야 정상 부근에 제단으로 쌓아놓은 돌무더기나 벽돌 정도를 볼 것으로 예상은 되지만. 또 거기서 둘러보면 주변이 멋진 파노라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상국과 나는 조용히 있었고 혁국은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태백산에 오르고 싶어 했던 재관의 주장은…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그러하니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일 년 전 가을 여행에서, 아직 단풍이 들지도 않은 푸른 초목들을 내내 보면서도 재관이 굳이 내장산 입구만이라도 가보자고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했다. 혁국은 그의 말을 듣고 "단풍도 들지 않았는데 거기에 왜 가냐"고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그의 말에 따라 내장산 입구까지 갔었다. 그때 나는 아픈 상태였으며, 뒷좌석에 거의 잠이 든 채 어디로 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재관의 말을 따라갔던 곳은, 그곳이 내장산 입구라고 말을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 그냥 바깥 풍경만 보면 어디가 어딘지 전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사방은 온통 푸른 나무와 잎사귀들만 가득 둘러싸여 있을 뿐이어서 그곳이 내장산 아니라 속리산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가을 단풍이 깊이 들었다면 달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아직 단풍도 들지 않아 내장산이라고 해야 여느 산과 별다를 것이 없었고 우리처럼 굳이 찾아온 여행객도 하나 없었다.


그래도 재관은 꿋꿋하게 말했다.

“이렇게 와봤으니, 이제 내장산 입구에라도 와봤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딱히 밝힐 만한 별다른 추억은 없지만, 그래서 비록 그때 아파서 거의 눈을 감고 다녔던 나도 덕분에 '내장산 입구'에 다녀오기는 했다.


내장산에 관한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랬는지, 혁국은 이번에는 재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상국과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러더니 이런저런 대화 끝에 누가 말했는지, “부석사”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내 귀가 번쩍 트였다.


‘부석사는 영주에 있고 영주는 강원도가 아니라 경상북도에 있는데, 부석사라고?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라고? 우리가 부석사와 가까이 있다고?’


친구들이 이끄는 대로 김삿갓 묘역에서 왔지만 내 머릿속에 지리적 좌표는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김삿갓 묘역이 영월에 있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깨달았다. 혁국과 재관이 데리고 가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갔기 때문에 나는 지도도 살펴보지 않았던 것이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작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이므로.


나는 영월이 영주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부석사로 가려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가야 하는데… 지도를 보니까 영주는 의외로 멀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백산이 아니라, 부석사로 가야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부석사 좋다. 거기로 가자.”




2.


김삿갓 묘역에서 나온 우리는 그의 시에 관해 전혀 논의하지 않았다. 그가 떠돌아다니는 방랑시인이며 탁월한 풍자시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아는 게 없다고 해야 맞을 듯했다. 그래서 왜 그의 생가나 묘역이 영월에 있는지조차 의문시하지 않았다. 누가 알고 있었다면 조금 더 설명해 주었겠지만, 우리 가운데 김삿갓에 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딘가 철 지난 유행을 보듯 그를 생각하는 듯도 했다.


그런데 운전을 하던 혁국이 불현듯 말했다.

“김삿갓 생가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홍길동 생가도 이 근처에 있다고 하더라.”,

“홍길동 생가가 있다고?”

“그게 말이 되냐. 소설 주인공이 생가가 있다는 말이?”

엉뚱하게 홍길동 얘기가 나와서 잠잠하던 차 안에서 수다가 시작됐다.


혁국의 새 차는 AI가 장착되어 있다. 그는 전면 스크린을 터치하더니 자동차에게 물었다.

“홍길동이 생존했던 인물입니까?”


“네 홍길동은….”


자동차 기계 속에 숨은 어느 여성이 낭랑한 목소리로 뭔가 길게 대답했다.

홍길동은 실존인물이며, 어쩌고 저쩌고.


AI의 대답을 듣고, 혁국과 재관은 그 내용이 엉터리라고 말했다. 홍길동은 소설 속의 인물인데 왜 실존인물이라고 자동차 AI가 대답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우리는 AI가 그냥 이런저런 데이터를 짜깁기해서 대답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혁국은 이미 핸드폰에서 챗GPT 채팅을 선보인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라고 해서, 나는 챗GPT에게 물었다.  


“홍길동은 실존인물입니까?”

나의 핸드폰에서 챗GPT가 대답했다.


“아니요. 홍길동은 실존인물이 아닙니다. 홍길동은 조선시대 작가 허균이 쓴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으로, 가상의 인물입니다. 홍길동은 의적으로 묘사되며, 부당한 권력과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약자를 돕는 영웅적 인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이들이 실제 역사적 인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혁국과 재관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홍길동 생가가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여간 별일이다.”


서얼이라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은 소설 속 인물이고, 그가 의적으로서 활빈당을 만들고 탐관오리들을 혼내고 군대와 싸우고 요술까지 부리는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 유배 갔다가 훗날 탈출하여 율도국을 건설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혁국 자동차의 AI와 내 핸드폰의 챗GPT가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는 현실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AI나 챗GPT는 아직까지는 수많은 데이터를 모아서 잽싸게 짜깁기하여 대답하므로 그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우리는 허균의 홍길동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홍길동을 본떠서 만든 가상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야 비로소 홍길동의 실체에 관해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지금 두 홍길동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하려고 한다.


허균이 쓴 “소설 도입부는 조선조 세종 16년(1434년)에 태어났다는 내용이지만, 홍길동이 청년이 돼서 활동한 시대를 계산하면 문종 시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와는 무관한 소설 속의 설정이다.” (나무위키)


이 홍길동은 승상 홍문과 몸종인 춘섬 사이에 태어난 서얼 또는 얼자다. 적자가 아니라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며 서러움 속에서 자란다. 그런 그는 무술을 잘 연마하여 계급타파 의식을 가지고 탐관오리를 공격한다. 그는 무술과 학문에 모두 능할 뿐 아니라 분신술에도 능해서 여덟 명의 홍길동을 동시에 출현시킬 수 있다. 분신으로 나타나는 가짜 홍길동은 허수아비라서 아무리 칼로 베어도 홍길동 본신은 죽지 않는다. 풍운아 홍길동은 머리에 흰색 두건을 쓰고 푸른 외투를 입고 다녔으며 초립을 쓴 보부상의 모습이다.




3.


그에 반해,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인 홍길동에 관해서는 전라북도 최북단 장성에 있는 ‘홍길동 테마파크’에 가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홍길동은 15세기 중엽에 명문가의 서얼로 태어났으며, 첩의 자식이라 관리에 등용될 수 없었고, 좌절과 울분 속에 활빈당을 결성하여 의적이 되었다. 그는 후에 오키나와로 갔다고 하는데, 거기에 홍길동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장성군청 사이트에서 소개하는 홍길동에 관한 고증문헌은 아래와 같다. (https://www.jangseong.go.kr/home/honggildong)


한국 : 조선왕조실록, 택당집, 계서야담, 증보해동이적, 성호사설, 홍길동전, 위도왕전, 만성대동보, 홍길동유지, 동야휘집, 실존인물 홍길동

일본 : 팔중산유래기, 팔중산연래기, 궁고도구기, 구지천간절구기, 궁고도사전, 구양

중국 : 명사실록(明史實錄), 명사

조선왕조실록 필사본 : 조선과 유구왕국간의 교류 관련기사를 빠짐없이 기록

연산군 일기 : 홍길동의 오키나와 진출 사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택당집 : 조선 중기의 문신 (택당)이식(1584~1647)의 시문집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기술됨

그리하여 결국 나는 홍길동에 관해 더욱 헷갈려졌다.


소설 속 허구적 인물로만 알고 있었던 홍길동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고, 활빈당으로 활약했으며, 오키나와로 갔다고 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아득한 기분이다.


그러나 설사 홍길동이 실존인물이라고 해도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만큼 탁월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fnFeXa0nGao

Aram Khachaturian — "Adagio of Spartacus and Phrygia" from the ballet Sparta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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