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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기억

이제, 샛별이 되었다.

by 자유인

유난히 정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헤어짐은 원래 모두에게 아쉽고 아린 것일까?

뻔한 이 질문에 아직도 답하기 어렵다는 건 헤어짐이 주는 아련함에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일 테다.


내가 그렇다. 지금껏 숱한 헤어짐이 있었고 하루하루가 이별의 연속인데도 헤어짐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순간에는 체한 듯 가슴이 먹먹해진다. 헤어짐에 적응하기보다 살아있다는 증거쯤으로 알고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가장 아팠던 첫 이별 기억은 여섯 살로 추정되는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늦은 밤 엄마와의 이별이다.



대구시 봉덕동 한 골목에 어린 여자 아이의 애절한 울음이 울려 퍼진다.

엄마와 헤어지기 싫다며 있는 힘껏 내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동네 사람들을 골목으로 불러 세운다.

대낮까지만 해도 동네 아이들과 잘 놀며, 깔깔거리던 이 여자 아이가 이렇게 우렁차게 울어 대다니.

땅꼬마 같은 어린아이가 목청도 좋고 힘도 세다.


어른들은 내 온몸을 움켜 잡고 그들 마음대로 한다.

내 키는 왜 이렇게 작은 걸까?

옷가지를 챙겨 나가는 엄마를 잡아 보려면 지금 쯤은 어른들의 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보려 해도 어느새 내 몸을 낚아채는 어른들의 날쌘 움직임은 또 뭐람?

아... 이제 엄마가 선명한 푸른색의 철제 대문을 나선다.


지금 엄마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남은 건 소리밖에 없다. 더 크게, 더 우렁차게 내지르고 봐야 한다.

혹시 엄마가 나를 도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나!!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 엄마 편은 없나 보다.

아무도 짐을 싸서 나가는 엄마를 말리지 않고 나만 못 살게 군다.

어른들은 모두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이 동네를 떠나게 될 것을.


이제 정말 끝인가 보다. 엄마는 벌써 골목 어귀에 다다랐고 이제 곧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나의 첫 이별 기억이다. 사정은 이랬다.

엄마는 22살에 가난을 피해 26살 청년이던 아빠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고 서른이 되기 전에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하고

주택을 소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잡았다.


아빠는 바람둥이였다.

대구 동성로에서 소문난 미녀였던 엄마를 낚아채 놓고선 DNA에 새겨진 바람기를 부리며 살기에 바빴다.

'그래도 이혼은 안된다. 조강지처 버릴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니다.' 엄마는 이렇게 아빠를 믿으며 몇 해를 보냈다.

그런데 장녀인 내가 태어난 것은 마냥 기뻤지만, 세 살 터울로 여동생이 딸로 태어나자 집안의 대가 끊어지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할머니는 엄마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아들이 새 장가가서 대를 잇게 할 요령이셨다.


그래서였다. 어린아이의 절규가 있던 그날 밤, 봉덕동 어느 골목길에는 엄마 편이라고는 없었던 이유.

남편의 숱한 외도를 참아내고 가정을 지키려고 했던 엄마를 옷 가방 하나 겨우 챙겨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비정함을 생각하면 세상은 때로는 선하게 산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이 이별 장면은 대학시절 정신분석학 수업에서 자기 성찰 보고서 과제를 하면서 처음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리학 공부의 묘미는 나로 향하는 탐사 여행에 있었다. 과목마다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보고서를 제출한 예가 많았는데,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편안해지는 묘한 기분은 늘 반전이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과제를 할 때마다 나는 늘 진지하게 임했다.


정신분석학 과제는 학기 초에 제시되었고 종강 시점까지 꼬박 석 달 이상 진행해 나갔다. 이별에 관한 이 첫 기억을 처음 떠올렸을 때, 등짝이 오싹해지고 갑자기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에서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아찔한 찬기가 느껴졌다. 생경한 느낌은 두려움처럼 다가왔고, 더 이상 한 글자도 타이핑할 수 없이 내 몸을 꽉 잡은 어른들의 힘이 생생하게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별에 관한 이 잔혹하고 생생한 기억이 떠오른 지 20여 년이 지났다. 오늘은 '작별의 종류'라고 제목을 쓰고 이별에 관한 기억들을 추적하다 보니 이 첫 기억이 떠올랐고 또 이 기억에 머물러 의식의 흐름에 나를 맡겨 본다. 아마도 아직도 이 기억과 내가 함께 하며 다루어야 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테다.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쓴다. 쓰고 싶은 바가 있다면 무엇이든 쓰도록 내 의식을 통제하지 않는다. 더 다양한 삶의 색채와 더 향긋한 삶의 향기는 그 통제하지 않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의 해방감을 존중한다.


엄마와의 이별 기억이 지금껏 내 삶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우선 어른들의 힘의 위력을 제대로 알게 된 탓에 나도 일찍이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엄마와의 이별 이후, 내 유년기는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도 하늘 보기를 좋아하는데, 하늘을 보며 누군가와 대화하듯 생각에 잠기는 것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쓸쓸함은 사색을 낳는다. 사색이 많아지면 철이 빨리 드는 것 같다. 어른 흉내 같지만 이것도 생존을 위한 기제이다. 주어진 상황을 납득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득해 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나조차 구차한 설명으로 이별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사색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다행히 사색의 방향은 하늘로 향해 기도가 되었고

이별을 이해하기 위한 사색은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깊은 이해의 장면으로 나를 인도했다.

아픔을 지나 회복으로, 쓸쓸함을 지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동시에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꿋꿋하게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머리가 아니라 행동으로 체화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인생의 어느 장면도 단숨에 화면이 바뀌는 영화 같지 않다데 있다. 아픔과 쓸쓸함의 긴 터널은 생각보다 길었고, 그 길 위에서 나도 흔들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래도 나를 향한 탐사는 기억을 깨웠고 기억들은 다시 나를 살려냈다.


내가 진정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이 찾아온 이별로 아파봤기 때문이다. 마구 흔들려 봤기에 굳건히 살아감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아픈 이별이 내 삶에 주었던 영향력이 지혜가 되었기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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