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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지하보도를 지나며

짙은 회색의 상처에게 건네는 인사

by 자유인

며칠 전 친구를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에 다녀왔다. 대학시절만 해도 주말에는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그때 자취하던 곳이 대학로 근처라 종묘공원과 창경궁을 잇는 산책길의 아름다움과 사색의 시간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오랜만에 광화문 나들이다. 이게 몇 년 만인지 세어보니 1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낸 시간들이 일순간에 흘러갔고 마치 나란 사람은 광화문에서의 소소한 만남들과 추억이 있는 '나'와 그 소소한 일상을 소유하지 못했던 '또 다른 나'로 갈리는 듯했다.


잊고 지낸 세월과 커리어와 자녀 양육에 몰입하며 살아온 시간 앞에 무엇이 과연 '나'인지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순간처럼 지나버린 10년. 후회 없이 살았기에 그 시간이 찰나로 여겨지는 것이니 다행스러운 것으로 정리해 두기로 한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번잡한 도심으로 외출할 때는 살짝 감도는 긴장감이 있다. 이 출구, 저 출구 헤맬 때도 있고 방향을 읽어 엉뚱한 곳에서 한숨 지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광화문 개찰구를 나와 보니 20대의 내가 된 듯, 변했지만 남아있는 익숙함이 안도감을 주었다. 교보문고를 행하는 길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 정도면 오늘은 괜찮은 날이다.


그런데 그 지하보도에서 인상적인 한 장면을 만났다. 지하보도의 기둥과 기둥 사이에 짙은 회색의 꼬질꼬질하게 때가 낀 이불로 누군가의 처소가 나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낡고 어딘가 망가진 듯한 캐리어가 이부자리 가까이에 배열된 것을 보니 "이 물건들은 모두 내 것이니 누구도 손대지 마시오."라고 나름 영역 표시를 해 둔 것 같았다. 그때가 오후 2시였는데 주인장은 어딜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누군가의 처소를 뇌리에 새기고 있었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 왜 영하의 추위에 광화문 지하보도에 짙은 회색의 처소를 마련해 둔 것일까?


잠시 이런저런 질문들을 떠올리다 '삶의 비애'에 생각이 닿았다. 생이 우리에게 준 고단함이야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래도 꿋꿋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단하게 또 생의 길을 떠나는 것이 우리의 여정이다. 그런데 그날 본 짙은 회색의 처소는 삶이 우리에게 깜깜한 어둠의 동굴 속에 가둬 버릴 때 망연자실하여 일어나지 못한 상처받은 자아를 떠올리게 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으리라. 한 줄기 빛이라도 찾으리라. 식지 않은 생명력은 온데간데없고 풀이 죽어 있는 누군가의 고개 숙인 뒷모습 같기도 했다.


정돈된 어둠. 정돈된 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도 괜찮단 말인가? 그냥 그렇게 어둠 속에 있는 나를 용인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단 말인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처소를 보며 내면의 비극을 이야기하자니 송구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곳을 바라보며 그 처소의 주인이 일어나 조금만 걸어 나오기를 바래보았다. 그것은 그에게뿐 아니라 내면의 나에게도 전하고픈 응원의 메시지 같은 것이다.


상처는 처음에는 드러나다가 견디기 버거울수록, 치유되지 않은 것일수록 심연의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마치 우리는 상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듯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 내면의 에너지 대부분은 심연의 상처를 고이 보존하는 데 쓰이고 실질적인 나의 삶을 위해서는 에너지를 쓸 수 없게 방해한다.


화려한 도심, 광화문 지하보도에 짚은 회색 톤으로 꾸며진 누군가의 처소는 마치 멀쩡한 듯 오늘도 주어진 생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부끼며 살아가고 있는 범인들의 내면 어느 한 공간을 엿본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나도 모르는 심연의 비밀창고에 어두운 상처들이 꽈리를 틀고 앉아 있다면 이제 그 상처에게도 일어나 걸어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스무 걸음만 힘을 내어 걸어가면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 욕심에 상처까지 모두 담아두고 산다면 우리 인생은 비극이 될 뿐이다. 지난 상처들도 잘 가라며 쿨하게 작별하며 살아보자. 상처까지 정돈하며 살기에 나의 삶은 너무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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