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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박정숙

by 자유인

인간의 사회성 발달은 자신을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때부터 시작된다. 그걸 알게 되면 인간은 서로 등을 기대어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어렴풋하게라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인간다움을 배워가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어떤 만남이든 흥미진진하고 애틋하고 소중했던 것 같다. 덥석 가까워지기도 하고 지키지 못할 수많은 약속들을 했고, 일단 애정을 주면 소중한 그 마음을 거두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이런 순수한 마음이 흐려지고, 타자와의 적절한 거리감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


요즘 가끔 생각한다.

'세월은 물처럼, 인연은 구름처럼 흘러가는구나.

나도 수많은 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흘러가고

어느 곳에서 만나면 조우하며 인연으로 엮어지다가도

그 인연이 다하면 또 각자의 길로 흘러 유유히 세월을 보내는구나.'


그렇게 흘러간 인연 중에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

그녀, 박정숙


그녀를 만난 건 야학에서였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영문과 선배 언니로 야학에서는 영어 선생님이었다. 앞머리를 모두 올려 널찍한 이마를 드러내고 묶음 머리를 자주 했다. 동그란 얼굴형에 촉촉한 피부의 청초한 느낌은 아직도 기억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그녀의 카레맛이다. 야학교사들은 당직을 정해서 쉬는 시간에 먹을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주로 간단한 일품요리였다. 그녀의 주메뉴는 카레였다. 물의 양을 조금 줄이고 재료들이 익어갈 때쯤 우유를 넉넉히 넣어주는 것이 그녀의 요리 비법이었다.


대단한 요리사의 일품요리 비법도 아니고, 스물둘 여대생이 만든 그 카레가 나는 참 특별했다. 맛있는 카레의 비법이라며 우유를 넣고 카레를 휘휘 젓던 그녀의 모습이 기억난다.


서른에 결혼을 하고, 남편은 내가 만든 카레를 맛나게 먹어줬다. 바로 그녀, 박정숙의 카레였다. 나는 요즘도 가끔 24년 전에 야학에서 배운 카레를 만든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을 알려준 그녀, 박정숙. 이러니 그 이름 석자가 지워질 리가 없다.


기억의 실타래를 잡고 하나씩 끄집어내면 그녀의 착한 미소가 떠오르고, 대화할 때 느껴졌던 따뜻함과 편안함은 참 좋은 사람에 대한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그녀, 박정숙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게 잔잔한 아름다움으로 내 속에 추억으로 간직하던 인연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까?

어디서든 행복할 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추억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남편이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곤 했다. 카레의 재료들이 잘 섞여 제맛을 내기 우유로 풍미를 더하듯, 나도 종종 그녀, 박정숙을 추억하며 어른이 되어 매마른 가슴에 삶의 풍미를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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