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중학생이 되어 교복 입으니 옷은 필요 없어요."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에게 던졌던 말이다. 엄마는 두 자매를 홀로 키우시면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키워주셨다. 특히 예쁜 옷을 입는 것은 엄마의 장기 같은 것이다. 지금은 벌써 60대 중반이 되셨지만 여전히 엄마의 맵시는 따라라기 힘들 정도이니 아마도 폼나게 옷을 고르고 입고, 입히는 재주는 엄마의 타고난 재능인 것 같다.
엄마의 DNA 중에 맵시 있게 옷 입기 능력을 난 별로 물려받지 못한 것 같다. 사실 엄마의 폼나는 손길이 늘 편하지만도 않았다. 옷을 하나 입는 것에도 아름다움에 관한 자기만의 개성이 표출된다. 나는 한 두 가지 색상을 섞어서 아주 심플하게 입는 걸 좋아한다. 한편, 엄마는 색 감각도 뛰어난 데다 여성복 매장을 20년 이상 운영한지라 옷감의 소재에서 소품까지 고려하여 연출하신다. 서로 다른 엄마와 딸인데, 서로를 인정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는 옷 입는 것에 대해서는 내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평가를 하신다. 그런 엄마의 딸로 자라면서 피곤할 때도 많았다. 이래라, 저래라가 너무 많아서 말이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옷을 맞춰 입었는데, 가방이나 신발, 소품들이 잘 어울리지 않을 때 엄마의 맵시가 살짝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학생이 되면서 내가 던진 저 한마디 말은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표현이다. 우선 사춘기를 지나면서 예쁜 옷을 입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데, 교복이 생겼으니 이제 사복들은 필요 없다는 것은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어른스러운 장녀의 기특한 요청이었다. 이 말은 엄마에게도 기억에 남았던지 한동안 친구들을 만나시면 속 깊은 딸이라며 칭찬 섞인 자랑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숨겨진 속뜻이 하나 더 있었다. 그 말을 던졌던 상황이 새 옷을 사러 가서 여러 옷을 입어보던 차에 했던 말이다. 엄마의 지시에 따라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며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내가 입을 옷들에 대해 나의 주관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내심 불편했던 것이다. 다른 상황에서는 나의 의견을 물어주셨지만 옷 하나만은 엄마의 뛰어난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기특해 보이기도 하는 저 한마디 말을 던졌던 것이다.
"제가 선택하고 싶어요!"라고 말이다.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의 크기와 깊이가 상상 이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전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나란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기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내게 이렇게 변하지 않고, 점점 깊어지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이 셋을 낳고 키우며 얻은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사랑과 간섭 사이에서 자녀들의 선택보다는 나의 선택을 우선시할 때가 많았다. 이럴 때 부모는 여전히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자녀들은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중학생이 되던 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생활의 면면에서 아이들이 불쑥 내뱉는 말에 혹시 엄마 된 내 모습에서 아이들이 지키고 싶은 경계를 넘어선 간섭은 없는지, 내가 사랑을 오해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이 필요하다.
며칠 전 여섯 살 난 막내에게 남편이 "화장실에서 소변볼 때는 늘 조심해야 해!"라고 짧은 잔소리를 했다. 화장실 청소 담당인 남편은 흘려 놓는 막내의 소변이 불편해서 불쑥 나온 잔소리였다. 되돌아온 막내의 말이 "네! 아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제가 정리할게요!" 맞다. 6살 아이에게 소변 보고 정리하는 일 정도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느껴졌나 보다. 믿음이 가진 않지만 의심도 금물이다. 내가 발달과정의 각 단계를 훌륭하게 지나와 지금의 내가 되었듯이 우리 아이들은 각자 스스로 책임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봐 주고 믿어준다면 그 사랑의 행위는 아이들이 사랑이 맞다고 인정해 주지 않을까 싶다. 할 수 있다고 하니 믿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