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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삶

죽음과 일상에 관한 단상

by 자유인

몇 해 전 노인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란 어떤 모습인가에 관해 연구하느라 노년기에 접어든 몇몇 노인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지금 나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 일단 살아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수해째 자살률 높은 나라로 꼽히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하자면 개똥밭이라도 이승이 좋다는 목소리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회적 현실이야 어떠하든, 죽음은 모든 산 자에게 다가올 미래이자 거역할 수 없는 생애사건이다. 그렇지만 죽음은 삶과 대비되었을 때 어둡고 두려운 그 무엇이다. 되도록이면 생각하고 싶지 않고 잠시 죽음에 관한 생각에 들다가도 내가 뭣하러 죽음을 생각하나 싶어 사색의 문을 닫게 만드는 주제이다. '고작' 사십 년을 살아온 내가 진행한 연구였으니 '좋은 죽음'이라는 주제는 나에게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년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잘 죽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할 주제임은 분명하다.


이 연구를 하면서 만났던 한 여성 노인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런저런 삶의 여정을 오가며 짧은 시간이지만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그러던 중 결론처럼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 묻게 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 내가 쓰던 손걸레를 깨끗하게 빨아 두고 가고 싶어요."


여성 노인의 답변이다. 정갈하게 살다가 죽은 후의 뒷모습마저 빨아놓은 뽀송한 손걸레처럼 깔끔하기를 원하셨다. 정갈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실적인 기대가 담긴 표현이었다.


죽음을 떠올리면 밀려드는 당혹감과 두려움에 챙길 것이 너무 많다. 혹여 재산이 많다면 자식들 간 싸움거리가 되지 않게 미리 상속절차도 밟아야 할 테고, 남겨진 사람들과의 관계도 정리가 필요할 테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남은 자에게 건넬 인사도 다양할 것 같다. 혹시, 예상치 못한 때 이른 죽음을 떠올리면 가슴 아린 슬픔과 아쉬움에 침잠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기도 하다.


그런데 정갈한 죽음이라셨다. 돈도 관계도 아니고 자신의 뒷모습이 마음에 쓰이신단다. 내가 쓰던 걸레 하나까지 단정하게 정리하고 싶다는 한 노인의 좋은 죽음에 대한 바람을 곱씹다 보니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의 하루를 복잡한 소리와 에너지 큰 움직임으로 채우며 살아온 내 일상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분주한 나의 일상들은 죽음이라는 반사체와 만나 갖고 있던 활기를 모두 잃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정갈한 죽음은 모두에게 그냥 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친다.


바람결에 흔들리듯, 외부 환경에 나부끼며 주인 잃은 삶이 내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지 질문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 걸레 하나를 깨끗하게 빨아서 가슴까지 시원해지도록 탈탈 털어 말리듯 정돈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본다. 의무감에 했던 일들, 주위의 시선에 사로잡혀 분주하게 감당하던 다양한 역할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몹쓸 책임감에 오기까지 부려오던 일들, 내려놓으면 자아가 죽어갈 것 같은 자존심 섞인 '그것'들...


죽음에 비추어 정갈한 일상으로 정리할라치면 내 일상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털어내야 할지 분명해진다. 주인공처럼 굴던 많은 것들이 이제야 '부수적인 것들'로 제 옷을 갈아입는 것 같다. 삶에 드리워진 죽음이라는 시선이 그렇게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다. 그래서 죽음은 더욱 삶을 생각하게 하고, 삶을 더욱 영글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끝에 있는 '한 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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