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2 : 사는 고통이 죽는 것보다 더 힘겨울 때

삶은 끝까지 보석찾기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by 자유인

연구자의 입장에서도 죽음 연구는 참 어렵다. 호흡하며 살아있는데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조차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삶은 곧 빛이고 밝음이나, 죽음은 곧 깜깜한 어둠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그저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노년기를 연구하다 보면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죽음 이슈인지라 나 역시 조금씩 더 자주 이 주제와 만나려고 여전히 노력 중이다.


인생의 어느 때든 삶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명제쯤은 어른이 되면서 익숙해진다. 성숙하고, 성장한다는 건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얻어지는 고귀한 결과물 같기도 하다.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도 마찬가지다. 죽을 리 만무했지만 우리는 일생의 고비들을 '죽을 뻔했다'며 과장된 언어를 쓸 때도 많지만, 죽을 뻔했을 뿐 여전히 살아있기에 우린 그 경험이 주는 교훈을 지혜로 여기며 한걸음 한걸음 생의 여정을 걸어간다.


노년기에 경험하게 되는 사는 고통은 다른 어떤 생애 단계와는 결이 좀 다른 것 같다. 아주 만성적인 고통이 노년기에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할 일도 없이, 고립되어, 가난한데, 몸의 병과 마음의 병까지 들어 있다면 그런 고통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누구든 쉽게 상상할 수 없으며, 그 무게는 무겁디 무거운 것이다.


배우 윤여정이 박카스 할머니로 나왔던 '죽여주는 여자'라는 영화가 있었다. 굴곡 많은 젊은 시절을 보낸 여인이 노인이 되어서는 노인 대상의 성을 파는 소영으로 나온다. 자신의 고객이었던 점잖았던 할아버지들은 이 여인에게 버거운 부탁을 한다. 가족 없이 치매로 자기를 상실해 가는 노인, 요양병원에서 죽음만 기다리며 자식에게도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할 지경으로 전락한 또 다른 노인은 각기 사는 것이 고통이라 죽기를 바라며, 사는 고통조차 잊고 사는 소영이라는 노인에게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2018년으로 기억된다.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더 이상 사는 것에 의미가 없었기에 의사조력사가 허용되는 스위스로 가서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버튼을 스스로 누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구달 박사의 사례가 전 세계에 이슈를 던졌고 그 후 국내에서도 조력존엄사법이 실제로 발의되기도 했다. 올해 2월에도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와 부인 외제니 여사도 동반 안락사를 통해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허구인 영화와 현실에서의 사실적 죽음의 스토리는 다르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모두 소진해 버렸을 때 인간이 손을 뻗고자 하는 종국이 죽음이라는 것은 같아 보인다. 살아서 겪는 고통이 살아갈 의미를 더 이상 떠받쳐 주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인간은 더 없는 고통에 치닫는다. 노인들이 느끼는 죽음의 그림자는 바로 이 지점인지라 안락사, 조력존엄사에 관한 논의는 노인인구가 많아질수록 더 빈번하고 생생하게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죽음에 관한 논의는 인간 생명의 존엄이라는 이슈와 만나기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며 더없이 미천한 모습으로 전락된 인간의 삶을 과연 여전히 존귀하다고 할 수 있는가? 더 무너지기 전에, 더 고통에 씨름하기 전에 적당히 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낫지 않나? 등의 인식과 만나게 된다. 생의 마지막 죽음 여정을 우리는 임종기라고 하는데, 이 임종기에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생명의 존귀함으로 여기고 치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뭐, 이런 질문도 쉽지 않은 무거운 질문이다.


존엄한 죽음을 이야기하며, 몇 해 전부터 연명의료중단을 개인이 먼저 선택해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은 이미 작동하고 있고 노인들에게는 이미 파다하게 퍼져있는 죽음 준비의 한 모습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자연스럽게 탄생과 소멸의 여정을 거친다. 인간도 그런 생명체이니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기어이 소멸을 막아보겠다는 불멸의 의지는 더 이상 노인들에게 힘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 가능한 것도 그런 인식의 토양이 마련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자연스레 연명할 수 없는 생명에 과도한 의과학적 처치를 중단하겠다는 선택과 스스로 내 삶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선택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들을 만나보면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지.", "곧 죽어야 해. 너무 오래 살면 못써." 이런 말씀을 어렵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사회복지사들은 안다. 그런 노인들이라도 목숨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살아지는 대로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계신다.


요즘은 노부모를 집에서 더 이상 모실 수 없을 때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그나마도 일반적인 사회 모습으로 용인되는 것 같다. 서울시가 300인이 입소 가능한 대규모 요양시설을 열었을 때, 나는 당시 개관 멤버였다. 기사가 나가자 9시부터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문의전화가 왔고 전국의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던 노부모를 서울 사는 자녀가 모셔오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들어온 노인들은 요양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분들이었다. 마치 고려장을 당하는 듯 슬펐지만 열심히 사는 자녀들을 봐서라도 슬픔을 내색할 수 없는 분들이었다. 나는 그분들의 일상을 함께하는 사회복지사였고, 그때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속내에 숨겨있던 삶의 애환을 풀어놓을 수 있도록 돕고자 애썼던 기억이 난다. 요양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외부자에게는 죽음의 장소이다. 그런데 막상 요양원에서의 삶도 오래 지속되다 보면 집에서 느끼는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삶의 공간으로 그 의미가 변모되기도 한다.


이때 만났던 한 여성 어르신이 지금껏 인상 깊게 남아있다.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안 아픈 곳이 없고, 우울감도 높으셨다. 처음인 요양원 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수개월은 걸렸다. 이 분이 늘 입에 붙이고 살았던 말이 "죽어야 혀. 얼른 죽어야 혀." 내가 나로 살아가지만 내 생명의 주인, 생명의 주관자는 내가 될 수 없는 것 같다. 죽고 싶지만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시는 분들을 보면 나는 그분들의 하루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수 해 동안 모셨던 그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한두 달쯤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 나는 그래도 여기서 살면서 좋은 날도 많았고, 기쁜 날도 많았어요. 평생을 숨죽이며 조심스럽게 살았는데 여기 와서 음악도 배우고, 미술도 배우고, 노래도 하고. 그렇게 사는 게 또 괜찮았어요."


요양원에서 만난 어르신들과의 헤어짐은 대부분은 죽음이었다. 눈앞에서 임종을 본 적도 있었고 생명이 위태태해지면 병원으로 모시기도 한다. 나는 그 여성 어르신이 요양원 생활이 그래도 좋았다는 말씀을 하실 때, 사회복지사로 한 생명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나 역시도 들었다. 수년을 함께했고, 죽을 뻔한 고비들을 넘기며 지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났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실 때는 대단한 병이 아니라 감기로 시작해서 폐렴으로 발전하고 결국은 이기지 못하시고 죽음을 맞이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이 어르신도 얼마 후 환절기에 감기에 걸리시더니 끝내는 죽음의 긴 여행을 떠나셨다.


요양원이라는 죽을 때나 간다는 그곳에서 만났고, "죽어야 된다."를 입버릇처럼 하셨던 그 어르신이 꾸역꾸역 그래도 살아내다 보니 "좋은 것도 있더라."는 고백이 사실은 노년에 살아가는 맛의 고작일지도 모른다. 하늘의 별이 반짝이듯 내 삶을 빛나게 해 줄 빛들이 다 사그라들어 사는 동안 죽음 생각이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 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노인들을 만나면 애써 죽기를 포기하고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는 맛이 쓰고 회색빛에 암울해도 살아감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우리 생명의 주관자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전해 줄지 아무도 모른다. 사는 건이 위대한 건 어떤 어둠의 순간에도 희망의 빛을 읽지 않는 것에 있다.


먼저 간 구달 박사님도,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도 결국은 모든 희망을 잃었던 분들이다. 그러나 지금 생명이 있고 호흡하고 있는 모든 인간이, 심지어 어린아이에서부터 임종기를 지나는 모든 분들까지. 죽음의 문을 여는 그 마지막 순간 우리 생애의 고귀한 보석 찾기의 여정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무리 더욱 진지하고, 치열하게 안락사 논쟁이 벌어진다 해도 나는 그 논쟁에서 빠져나와 내 삶과, 내 생명에 최선을 다해 보려 한다. 죽도록 죽고 싶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보려 한다. 그것이 내게는 내 존엄이다.







이전 06화웰다잉 1 : 나이 들면 달라지는 시간조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