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 대한 이기적인 원픽이 필요하다
사는 동안에는 사는 것만 생각하는 거지, 뭣하러 죽음까지 생각한담?
인간이 아무리 사유에 능하다지만 그럼에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죽음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질문이라고 답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지?'
'나는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이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등등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며 나에게 되물어보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난해한 질문들이라는 사실이다. 호흡하며 사는 동안 삶과 관련한 다양한 질문들에도 이렇다 할 정답을 찾아내기 어려운데, 죽음에 대한 성찰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가끔은 사는 것이 답답하고 힘들 때면 죽음과 같은 상태가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물론, 힘들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상의 패턴일 수 있지만 힘들다고 죽음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살행위는 자기 파멸적인 선택이고 이런 선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벌써 20년이 넘은 듯하다. 대학시절 교양 수업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을 때 과제가 '유서 쓰기'였다. 파릇한 이십 대 어느 봄날, 유서를 쓰면서 꺼이꺼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후회와 감사, 사랑, 용서 등에 대한 자백의 글쓰기를 혼자 하면서 일종의 감정의 정화와 치유의 경험이 지금도 생생하다. 육체의 생물학적 실존의 의미로 따져보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죽음이지만, 막상 죽음 앞에 섰다고 상상하자니 불가능한 것이 없어지고 넉넉한 가슴으로 소화되지 않는 상황들조차 품어내는 것에 큰 에너지가 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이 그래서 더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연구는 철학과 같은 인문학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구자로서 눈을 크게 번쩍 뜨게 하는 연구들은 의학논문들에서 더 많이 관찰되는 것 같다. 일례로 의료현장에서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s)을 한 실제 사례의 보고 내용에 관한 연구들은 매해 새롭게 보고 되고 있다. 그리고 연구논문들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죽음에 매우 근접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세계관, 인생관이 급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죽음은 삶에 어떤 단서를 던지며 삶을 풍요하게 하는 방법을 죽음을 통해 찾아보라고 넌지시 훈수를 두는 듯하다.
핌 반 롬멜 박사의 심정지 후 다시 살아난 근사체험자 344명에 관한 기록을 연구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보고는 매우 특별하게 다가온다.
1. 유체이탈 경험
- 육체를 이탈해 외부에서 사건을 인식하는 경험을 보고함.
- 오래된 옷을 벗듯 육체를 빠져나오고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
- 인지능력, 감정, 매우 명료한 의식까지 그대로임.
2. 삶의 회고 경험
- 한눈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살펴봄.
-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음.
- 자신의 관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도 알 수 있고,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게 됨.
- 사람의 중요성을 알게 됨.
3. 죽은 이들과의 만남
- 죽은 자들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음.
- 자신이 알지 못했던 생부를 만난 경험을 보고하기도 함.
4. 몸으로 되돌아오는 경험
-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아직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서
- 질병과 고통의 한계에 머무르고, 육체의 한계를 짊어지고 살아가게 됨.
5. 사라진 죽음의 공포
- 죽음 너머에도 의식이 지속된다는 것을 확신케 해 줌.
-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삶이라 인식하게 됨.
위 내용들은 논문에 기술되어 있는 연구결과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학술적 연구결과는 엄격한 연구윤리와 과학적 연구방법의 적용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사실'에 대한 기술이 되고, 또 다른 지식을 쌓아 올리는 작은 구조물로의 제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이런 연구는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일종의 정신과정의 오류의 가능성에 대한 추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연구자들이 유사한 연구결과를 반복해서 도출한다면 무시할 수 없는 사실로 진입하는 과정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핌 반 롬멜 박사의 연구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소생한 연구대상자들이 보고한 경험의 진실여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한 경험 이후, 그것이 삶에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이것' 없이는 죽을 것 같은 무언가에 매달려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실제로 그것이 사라진다 해도 우리 삶은 변하지 않을 때가 있다. 헤어지면 곧 죽을 것 같은 연인과의 이별이 그러하고, 투자해 두었던 재산이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졌을 때도 결국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왔을 것이다. 곧 죽을 것 같지만 마침내는 살아냈던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기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철저하게 의미와 가치 중심으로 완전히 수정했다고 보고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발견은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고, 이후에는 누군가를 '조건 없는 사랑'을 하게 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세계,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세계에서만 살아간다고 가정하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해지는 것은 물질(돈)이다. 자산이 많으면 행복할 것만 같아서, 점점 사람들은 화폐로서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몰두하여 쏠려가는 것 같다. 그래야 사랑도 할 수 있고, 가족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인생에 '죽음'이라는 앵글이 삽입하면 그제야 사랑, 그것도 '조건 없는 사랑'이 보인다. 죽음과 함께 삶을 보면 그제야 시야가 확장되고 물질의 가치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가치에 따라 삶의 순서가 재정렬되는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새로운 질서이다.
나는 이 연구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불가지성에 있다. 진짜 완전히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누구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은 늘 인간의 지성으로는 모르는 채로 남아 두려움으로 대상화된다. 근사체험에 관한 연구는 실제적인 죽음 경험에 대한 연구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우리 인생의 어딘가에 있을 죽음으로 가는 문의 손잡이를 돌려 한걸음 내디뎌 본 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모르고 가면 두렵지만 알고 가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래서 근사체험자의 보고를 통해 죽음 이후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두려움이 가신다.
사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많다. 공기처럼 말이다. 지금 거울 앞에 서서 볼 수 있는 나란 존재가 아니라 육체에서 벗어난 또 다른 나란 존재에 대한 인식을 못할 것도 없다. 다만, 대상화된 공기는 믿어지지만 너무 소중한 '나'란 존재에 대해서는 실체의 양상이 변화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고정된 실체이고 싶어 하며 변화 그 자체를 수용하지 않는 인간 본성에 근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수년 전에 한국 사회에서 '좋은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람들의 인식을 탐구하는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때 인식의 한 유형 중에 '오래 살다 죽는 죽음' 즉, 살아갈 이유가 분명하여 죽지 않을 듯 살아가는 집단의 인식이 관측되었다. 극은 극과 만나는 것일까? 나는 이들의 인식체계를 추적하면서 삶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아들의 인식에는 죽음을 철저하게 수용하는 이중성이 함께 한다는 것도 동시에 발견하였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죽음에 두 가지 인식체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죽음을 정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소멸로 규정하게 되면 죽음을 부정하는 동시에 정서적 억압을 방어기제로 발동시키며 죽음에 부정적 태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죽음을 동태적 사건 즉, 사후세계에 대한 주관적 태도나 신념을 장착하게 되면 죽음을 수용하고 공포나 불안 대신 정서적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연구결과에 짐짓 놀라 죽음을 동태적 사건으로 수용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인식체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서울대의대 출신의 정현채 교수님이 죽음학에 대해 설파하면서 주파수가 다른 존재로의 변환이 곧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이라는 설명을 하신다. 인간의 실존적 존재를 신체와 마음으로 보는 것,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도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들에서도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에서는 육체, 영, 혼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니 물질적인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만 내려놓으면 삶은 육체 안에서 사는 것이고 죽음은 그저 육체의 소멸이지만 마음, 영, 혼의 실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는 논리에 직면하게 된다. 주파수든, 뭐든 변환의 과정이 죽음이 가지는 의미성의 본질이라는 것에 나는 동.의.하.기.로.했.다. 그것이 나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지만 죽음과 함께 삶을 생각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분명 해지는 것 같다. 원하는 것이 선명해지고, 꿈과 소명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은 삶 속에 걸리적거리는 잡음들을 일순간에 제거하며 집중해야 할 중심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 놓는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은 육체 속에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존재로서의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영원히 풀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의 문을 용감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믿음의 선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핌 반 롬멜 박사나 정현재 교수님, 그 외 문헌에서 말하는 근사체험자들에 관한 연구보고는 그래서 내게는 고마운 과학적 근거들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죽음 앞에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전환으로 두려움을 제거한 삶과 죽음의 여정을 떠날 것인가?
신이 우리에게 준 자유의지로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