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질의 완성은 죽음의 질에 있으므로
요즘 노년기 죽음에 관한 여러 주제 중 죽음의 장소에 관한 고민을 심도 있게 하고 있다. 연구자에게 고민이라 함은 국내외 문헌들을 살펴보고, 관련 통계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과연 죽음의 장소와 존엄한 죽음과의 관계는 어떠하며 좋은 죽음이 되기 위해 죽음의 장소를 어떻게 준비하는 게 좋을까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다.
신이 나에게 허락한 삶의 날들을 모두 소진하고
이제 죽음이 문턱에 서 있다면 그 장소는 어떤 곳이기를 원하는가?
과거에는 이 주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90년대로만 돌아가도 죽음의 장소는 집이었다. 그러니 나의 조부모 세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세대였다. 아주 어렸을 때는 장례행렬이 지나는 마을 행사를 할머니 치마폭에 숨어 보았던 기억도 난다. 물론 그런 죽음이 있기 전에 어른들이 저녁거리를 준비하기 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집에서 어르신 수발드느라 얼마나 힘든지 푸념을 늘어놓는 걸 종종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런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 자연스레 동네 한 노인의 죽음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동네에서 어느 집 노인이 병환 중에 있고 얼마나 위독한 지 어린아이도 알만했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단면이 그러그러하게 펼쳐진다는 것을 귀동냥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던 기억이 있다.
의과학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살기 좋은 이 나라에서 오랫동안 좋은 것을 보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은 어쩌면 전지구적으로 축복받은 대한민국에 살기 때문에 가능한 바람인지도 모른다. 의과학은 생명을 다루는 위대한 영역이다. 그런데 생의 마지막 단계와 죽음이 연결되는 임종기에 의과학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는 진지한 숙고가 필요하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것은 의학의 마땅한 역할이지만 삶의 가치가 상실된 채 목숨만 연명하는 것이 과연 인간다움을 보장받는 조치인가에 대해서는 다시금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강화되고 법적인 보장을 받게 된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죽음의 순간을 차가운 병실에서 여러 기구들과 연결된 선을 몸에 장착한 채로 맞이하는 것은 더 이상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죽음의 모습은 무엇인가? 따뜻한 공간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의식이 혼미한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을 느끼며 먼 길 먼저 떠나기 전 성에 차지 않지만 아쉬움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유효한 죽음을 우리는 원한다. 그래서 가장 선호되는 죽음의 장소는 언제든 1위는 집이었다. 이런 결과는 해외 연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선호되는 죽음의 장소는 단지 바람에 그칠 뿐 실제로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녀들에게 충분히 전하는 등 나름 죽음 준비에 열심인 노인들을 만나봐도 선호하는 죽음의 장소가 집인 것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집에서 죽으면 남은 자녀들의 뒤처리가 귀찮고 성가시다는 것도 노인들은 이미 알고 있다. 가족들도 물론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죽음 사건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이다. 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는 온전히 타자의 몫으로 동시적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으로 얽힌 가족 안에서의 한 사람(노인)의 죽음의 문제가 '성가신 일'로 치부되는 것이 참 아쉽다. 하지만 이것은 떠나는 사람이 남은 자에게로 향하는 마지막 배려 같은 것으로 해석되어서 선호와 현실의 죽음의 장소가 상이한 것이 이해되는 측면도 크다.
국내외 문헌들을 살펴보면 또 하나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실제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임종기를 더 열악한 상황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회경제적인 자원이 부족한 경우 실제로 병원보다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원하는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따뜻한 공간에서 사랑을 느끼며 마지막을 맞이하기를 원하지만 죽음에 임박하면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치료의 시간인지,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마지막 때인지를 누구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랑하기에 그 생명을 더 오래 부여잡고 싶은 마음에 병원에 몸을 맡기고 원했던 따뜻한 죽음 대신 차가운 작별을 안타깝게도 불쑥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사람들은 집에서 죽기를 원하지만 기대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불일치의 상황은 삶의 질을 완성하기 위해 죽음의 질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생명연장이나 치료에 개입하지 않는 따뜻한 죽음의 공간으로서 병원의 기능을 고려하는 것이다. 둘째는 임종기 간호 및 돌봄 서비스가 집에서도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도록 서비스의 확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둘 다 쉽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인구고령화로 의료비 증가와 노인부양부담의 증가에 관한 사회적 부담은 죽음을 의료의 영역으로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야기하고, 전문적인 호스피스 서비스를 집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체계는 지역사회의 돌봄과 관련하여 본격적인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의 장소에 대한 준비는 개인적으로 녹록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니 더 오래 준비하고 준비된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진지하게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의 청사진을 두고 내 삶을 역순으로 따져 봐야 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애써 비극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명료하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리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삶을 염두에 두고 죽음을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도움을 받으며, 무엇을 남기며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죽음의 장소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이런 질문들에 스스로 답을 찾으려 애써 보았으면 한다. 물론 정답은 없다. 희망보다 차선이 최선일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내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뜻이 전해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생명을 내가 먼저 지켜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