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혜 엄마가 준 선물

받았으니 이제 돌려줄께요. 되갚음의 기쁨

by 자유인

자녀를 키우는 건 엄청난 정성과 노력이 드는 일이다. 훌쩍 자라 중학생이 된 첫째와 둘째는 요즘 보아도 철이 없는 아이 같고, 이제 9살인 막내는 엄마 손이 안 미치는 데가 없다. 아이들과 경산으로 내려와서 지낸 지도 어느덧 해가 바뀌었으니 2년을 채워간다. 서울이라는 곳은 나를 일에 있어서 가열차게 움직이게 했던 반면, 지금의 생활은 그때에 비해 일의 강도가 반은 준 것 같다. 그 대신 한가로울 여지없이 나의 남은 에너지는 '더욱 육아'에 쏟으며 일하는 엄마로서의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방과 후가 되면 골목이 아이들의 놀이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안전한 골목이 있는 동네가 아이들을 보호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던 듯하다. 물론 내가 엄마가 되어 만난 육아의 환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간신히 어린이집이 있어서 일하는 엄마에게 어쩔 수 없는 고마운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출근과 퇴근 시간대에 어린아이들을 돌봐주는 손길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막내가 네 살 정도 되었던 때로 기억한다. 막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려오는 것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고심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상황에 맞지 않아서 급기야 남편이 아이 돌봄 구인광고를 아파트 게시판에 모두 붙이자고 했다. 동네 어르신들을 통해 수소문을 해봐도 해결책이 없던 터라, 될성싶지 않았던 남편의 제안이었지만 그러자고 했다.



별 기대 없이 2-3일이 지났던 것 같다. 늦은 밤 아이를 재우는데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왔다.

"아이 등하원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이 문자 메시지가 있기 전에 몇 통의 전화연락이 오긴 했었지만 아이를 맡기는 일이다 보니 마음이 썩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설혜엄마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늦은 시간에 문자메시지를 몇 개 주고받았는데, 설혜엄마 역시 삼 남매의 엄마이고 일도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직장이 가까워서 어린이집 등원을 돕는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더군다나 설혜네의 막내 태환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을 소개받아서 같은 어린이집에 두 막내들을 등하원시키는 일을 설혜네가 도맡아주었다.



몇 개월 전부터 막내의 등하교 라이딩을 하다가 할머니 한 분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등하교를 시키는 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다. 학교가 경산 외곽에 위치한 데다 학교 앞을 지나는 버스들이 많지도 않은데 매일 두 번 손자들을 등하교시키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고충이 느껴졌다. 그러다 갑작스레 설혜엄마가 떠올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설혜엄마는 직장에서도 책임감이 유별나게 강하고 마음도 따뜻해서 도울 수 있는 상황은 발 벗고 나서는 타입이었다. 그런 설혜엄마가 내가 아이들과 경산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암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가끔 서울에 올라가서 얼굴을 보았지만 겁내지 않고 맡겨진 일을 척척 해내던 힘찬 기색은 온 데 간데없었다.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로 응원하는 방법 밖에 없다.



나는 설혜엄마를 생각하며 매일 두 손자들의 등하교를 함께 하는 할머니를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빌린 돈은 이자까지 잘 쳐서 주인에게 잘 돌려주면 되지만, 내가 정말 필요하던 때 받았던 도움들 중 많은 것들은 되갚을 방법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설혜엄마에게 빚진 마음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 같았다.



나는 몇 날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귀가 때 만난 할머니께 어차피 막내를 라이딩해야 하니, 아이들 귀가 때는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전해 드렸다. 다음 날부터 두 아이들을 태우고 가면서 아이들의 이름이 민재와 로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아이들이 뒷자리에 앉아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참 사랑스럽다. 그리고, 5분 남짓 함께 하교를 하는 길에 나는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수년 전 설혜엄마가 나에게 전했던 호의를 내가 잊지 않고 갚을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민재와 로하를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잠시 병마와 싸우고 있는 설혜엄마가 기운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거저 받은 것을 기억하고 되돌려주며 사는 기쁨 때문에, 살아오면서 받아왔던 감사들을 다시금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며 살고 싶다는 생각에 나의 고민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인생에는 어떤 때가 있는 것 같다. 풍부한 영양분을 받아서 쑥쑥 성장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즈음에는 내가 가진 것을 쏟아부어 세상에 나누어야 할 때 말이다. 되돌려 주고 싶지만 사는 게 팍팍해서 '감사하다'는 말 밖에 갚을 길이 없는 때가 있고, 받은 것이 없는 사람에게도 거저 주는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이제야 주는 기쁨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동안 내가 받은 무수한 호의와 은혜를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수년이 지나서야 설혜엄마가 건넨 호의가 내 삶에 이렇게 풍성한 기쁨의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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