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에너지를 모아, 걸어야 할 때
18코스 올레길의 첫 복병이었던 사라봉에 올랐으니 이제는 내리막을 가야 할 차례이다. 오르막에서 숨이 차오르는 고통이 있다면 내리막은 쉬울 것 같지만 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잘 포장된 내리막 길에서 막내가 말문을 튼다.
"엄마! 이런 길을 만약에 자전거를 타고 오른다면요. 그때는 아빠가 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가는 게 좋다고 했거든요. 근데, 지금 내려갈 때도 지그재그로 가니 좀 편한 것 같은데요?"
역시나 아이들은 몸으로 배운 것은 잊지 않나 보다. 우리의 여행에는 해외 파견 중인 아빠가 빠져 있지만 아이는 아빠의 조언을 소환해 우리의 여행길에 아빠도 잠시 벗이 되게 했다.
"그것도 너무 좋은 생각이다. 산을 오를 때는 오르막길이 힘들어서 내리막길은 우습게 생각하고 빨리 내려가려고 하거든. 그런데 산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들의 인생에서는 힘들게 오른 곳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해. 그리고 내려가지 않고 정상에서의 삶을 누리려면 굉장히 애쓰며 살아야 해. 잘 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을까? 내 얘기에 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인생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모든 인생 여정에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퇴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변화무쌍한 여정을 나도 아직 채 모르는데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을 테다.
내리막길에 대한 사색은 요즘 들어 부쩍 늘었다. 나를 위해서만 살아도 괜찮았던 30여 년을 지나 가정을 일구고 자녀 셋을 낳아 키우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며 살아온 것이 그 후의 17년의 시간이었다. 부쩍 심해진 노안 때문인지, 건강검진에서 하나씩 걸려서 대학병원에 가서 후속처리를 꼭 해야 하는 사건들이 생겨서인지, 이전과 다른 나의 열정의 온도가 미지근해진 것을 나조차 실감하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여럿일 테지만 여하튼 요즘은 잘 내려가는 인생 여정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조금씩 더 약해질 테지만 그래도 마음속에는 더욱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살고 싶은 욕구만은 강렬해질 것만 같다. 그 와중에 나의 인생 후반부를 어디에서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내리막길을 걸으며 깊고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올레길의 초반이라 그런지 막내 녀석은 힘조절도 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마구 넘나들며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행동하고 있었다. 그때다. 둘째가 매섭게 한마디를 거든다.
"지금 그렇게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거든. 한두 걸음 갈 걸 열 걸음 들여서 걸으면 나중에 힘 빠져! 바로 걸어가! 장난치지 말고!"
절묘한 타이밍에 나와 둘째가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나는 저러다 말겠지 두고 봤다면 둘째 녀석은 톡 쏘는 말로 동생의 행동을 바로 잡았다.
그래, 나도 정신 차리자. 아직은 불필요한 상념에 에너지를 쓸 겨를이 없다.
전방을 응시하며 내 곁에 있는 아이들을 살피며 보호해야 할 때다.
나는, 아직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