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훈 오빠를 추억하며
내가 아홉 살이 되었던 해는 매우 특별한 한 해로 기억한다.
어머니와 나와 여동생, 우리 가족은 오갈 데가 없어 외삼촌댁에 살게 됐다.
외삼촌댁에 들어가기 몇 달 전 미용사셨던 외숙모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셨다.
외숙모가 돌아가신 빈자리에 잠시 머물게 된 것이다.
키도 큰 외숙모가 미용실에서 손님들과 나누던 호탕한 담소가 내 기억에 아직 남아있다.
35년 전이니 그때만 해도 유방암의 생존율도 높지 않았나 보다.
내 기억 속 외숙모의 마지막 기억은 활짝 웃는 모습인데,
생각보다 빨리 유명을 달리하셨다.
미용실 공간은 목공 솜씨가 좋았던 외삼촌 덕분에 뚝딱 방으로 탄생했고
방 두 칸짜리 집에 무려 일곱 식구가 함께 했다.
외숙모가 떠난 빈자리에 우리 세 식구가 들어가 한 가족이 된 것이다.
외할머니, 외삼촌, 외사촌 오빠, 외사촌 여동생, 어머니, 나, 여동생
성훈 오빠는 외사촌 오빠의 이름이다.
외할머니는 어린 네 아이를 돌보셨고,
외삼촌과 어머니가 경제활동을 해서 가계를 꾸려나가는 상황이었다.
며느리는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고, 딸은 사위의 외도로 이혼한 상황에서
별스러운 두 가정이 한 집에 부대끼며 살게 된 것이다.
1년 정도 함께 머물렀던 그 시간은 내게는 매우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어머니는 곧 예전에 살던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될 거라고 전학을 시키지 않으셨다.
붐비는 출퇴근 버스 안에서 어른들의 엉덩이에 몸을 들이 밀어 통학을 했던 기억은
내 인생 첫 '고단한 시절'의 기억이다.
유독 멀미가 심했던 터라 1시간 정도 소요되던 그 시간을
아홉 살 난 아이가 통학을 했으니 나의 깡은 아마도 그때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가 살던 집은 동네 초입에 있었고, 마침 멋진 놀이터가 새로 만들어져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 술래잡기, 오징어땅콩, 비석치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등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하나 되어 신나게 놀던 재미난 기억도 있다.
나는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에는 재능이 좀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한 살 많았던 성훈 오빠의 놀이는 나와는 좀 달랐다.
주로 형들이랑 놀고, 노는 장소도 남의 동네 뒷골목이 주무대였다.
사회복지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그 시절의 우리 가족을 생각해 보면
위기상황의 사례관리가 필요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아이 넷을 케어할 여력이 없으셨고
외삼촌은 사별 후 심리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안정적인 직장이 없던 상황이었다.
인생 근력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옷가게를 운영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려고 했지만
남편의 잦은 외도로 이혼을 결정한 지난한 과정에 대한 상처가 오롯이 남아있었다.
그런 어른들과 함께 하는 네 아이들은 그야말로 방임의 상황에 있었다.
물론 그때, 그 시절은 자녀양육에 대한 관심도가 지금처럼 높지 않았고
동네나 마을이 돌보는 시절이었다.
동네 골목에서 놀다 해 질 녘이 되면
"창수야~ 밥 먹으러 와라~"
"은희야~ 밥 먹자~"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을 하나씩 호명해서 집으로 데리고 가면
골목대장과 똘마니들은 삼삼오오 놀던 놀이를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무슨 용기에 의협심이었을까?
하루는 성훈 오빠의 의심스러운 행각을 나도 알아야겠으니
오빠가 노는 곳으로 나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열 살 밖에 되지 않던 오빠는 형들을 따라다니며
담배 피우는 형님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고 있었다.
자신은 추호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고 선언을 하며
나더러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성훈 오빠 열 살, 나 아홉 살이었던 때다.
집에 같이 가자며 울며불며 생떼를 쓰는 나를 빠른 걸음으로 따돌리며 가버렸는데
그날 밤 오빠는 늦은 귀가를 했고, 나는 내가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없던 것으로 했다.
비장한 각오나 의리가 발동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적인 느낌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처음 외삼촌 댁에 들어갈 때의 약속을 지키셨다.
예전 살던 동네에 새로 지은 아파트에 예쁜 우리 집을 마련하셨고
아이 둘을 돌봐주시는 보모 할머니도 함께 들이셔서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할머니는 매일 정성스레 동화책을 읽어주셨다.
이사 온 후부터는 외삼촌네를 만날 일은 명절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들이 사춘기에 들어선 때부터 외할머니는 근심이 커지셨다.
성훈 오빠는 잦은 외박에 통제되지 않는 생활 패턴을 보이고 있었고
여동생도 점점 오빠를 닮아가더니 중학생 때부터 가출을 일삼기 시작했다.
우리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오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날의 짧은 대화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현정아. 내가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교육은 니가 좀 시켜주면 안 되겠나?"
"왜? 내가 오빠 아이를?"
"나는 기본이 안돼서 자식 교육하기에는 걸렀고, 그냥 니가 해주면 내가 참 믿음직하겠다."
그 후로 성인이 되어서 나는 대구를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고
오빠와 소식을 주고받을 기회가 없었다.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았던 탓인 것 같다.
지금 성훈 오빠는 이 세상에 없다.
너무나 꽃다운 나이에 폐암에 걸려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성훈 오빠가 죽은 후에 더 많이 오빠를 추억하게 된다.
밤하늘에 바가지 모양의 북두칠성을 가르쳐 준 것이 오빠였고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아이의 미천한 속내를 나누었던 것도 오빠뿐이었다.
놀다가 목이 타서 물 한잔을 마셔도 동생들을 챙기는 정 많은 오빠였다.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 내면에 누구에게든 용수철처럼 작동하는 어떤 힘이 있는데,
눌려 있다가도 원상태로 복원되려는 힘이 바로 회복탄력성이다.
인간은 살다 보면 불안정한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행복과 안정감을 찾아가려는 고귀한 내적 에너지가
다름 아닌 회복탄력성인 것이다.
성훈 오빠를 떠올리면 나는 회복탄력성의 필요조건을 생각하게 된다.
어린아이에게 너무나 중요한 어머니의 상실 사건이 있었는데
누구도 그 아이에게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내가 도와줄게."
그 한마디를 건네지 못했다.
어쩌면 동네 뒷골목에서 "나도 너와 같은 일 겪어봤잖아." 하며
마른침을 연신 내뱉으며 담배를 꼬아 물었던 동네형들에게 위로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자기 아이의 교육을 부탁했던 성훈 오빠의 대화를 생각하면
그도 세월이 지나 무엇인가 잘못된 인생길을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다만 어디서부터 되돌이킬지, 내면의 회복탄력성을 어떻게 발휘해야 할지 몰랐을 뿐.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그의 몸을 앗아갔다.
성훈 오빠의 죽음 이후,
내가 아홉 살이었던 그때 그 시절이 가끔은 악몽처럼 회상된다.
내 삶에 찾아왔던 위험한 시절을 나는 어떻게 살짝 비켜갈 수 있었을까?
그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그래도 감사하게 된다.
사람을 지켜내는 일은 '한 사람'으로 충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한 사람의 부재로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성훈 오빠를 생각하며,
세상에서 의미 있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