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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복론

달콤 쌉싸름한 맛이다, 일상에 널려 있다.

by 자유인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낯설다. '행복'과 '행복의 조건'은 엄연히 다른 말이지만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면 어떨 때 행복한 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과정은 행복의 의미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게 한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복된 좋은 운수',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한다.


사람들이 행복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의미는 만족, 기쁨, 흐뭇함 등의 긍정적 정서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 이런 긍정의 정서 경험들이 찾아오는 지를 떠올리며 행복의 조건들을 열거하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행복의 조건들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행복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어제 행복했던 일이 오늘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행복의 사전적 의미 중 '복된 좋은 운수'에서 좋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서는 행복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살아오며 가슴 한편에 기대하고 바라는 소망들이 얼마나 다채롭고 많았던가?! 가슴 바구니에 소망이 담겼을 때 그 무게감에 두 손 모아 소망이 이뤄지길 기도하곤 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소원했던 것들이 모두 이루어졌다면 나는 과연 지금보다 행복할까?

아니, 지금만큼이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는 아닐 것 같다.


소망과 기대가 이루어지면 잠깐 기쁘고 만족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복된 좋은 운수'가 어쩌면 우리의 소망과 기대의 정반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도 때로는 나의 소망 정반대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맛으로 표현하라면, 그저 '달콤한 맛으로 설명되지 않는 쌉쌀하고 쓰디쓴 맛과 오묘하게 결합된 맛'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양극단의 맛들이 조화롭게 만나 인생 풍미가 느껴질 때 그것을 행복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한 가지! 행복은 특별한 어떤 것에서 일상 속 나와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복지사로 근무할 때 어느 할머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십수 년 곱씹으며 깨닫게 되었다.


십 수년 전에 나는 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했다. 사회복지사로서 나는 시설에서 살아가는 병약한 노인들이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남아있는 건강성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내가 참으로 애정을 느꼈던 어르신 중에 김경순 어르신이 계셨다. 그분은 어린 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 주인공 호호할머니를 닮았지만 내 눈에는 그 캐릭터보다 훨씬 귀여운 모습이셨다(어르신께 귀엽다는 표현은 송구하지만 그분을 향해 있었던 나의 달콤한 사랑과 관심의 표현 정도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어느 나른한 봄날의 오후 김경순 어르신과 나누었던 따뜻한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르신! 햇볕이 유난히 따뜻한 봄날이에요. 우리 봄노래 한 곡 해볼까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봄날은~ 간다~"

어르신은 주저 없이 옥구슬 구르는 목소리로 옛 노래 '봄날은 간다'를 한 곡 뽑아내셨다.


그리고 나는 무심코 여쭈었다.

"어르신, 이렇게 오래 살아오시면서 행복비법이 있다면 무엇이셨을까요?"


이 질문은 어르신께 현재의 행복 수준을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인생의 어느 시간 봄날 같은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기에 그저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여쭈었다. 병약해져서 요양원에서 지내시는 노인분들이지만 나는 그분들의 인생의 긴 여정, 그 자체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나에겐 오리무중이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혹시나 이 어르신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날, 김경순 어르신의 답은 지금도 생생하고, 생각할수록 놀랍고, 되새기면 기분이 좋아진다.


"선생님, 맛있는 김치 많이 담가 먹는 거요. 배추김치, 열무김치, 총각김치... 김치 많잖아요. 그것들 많이 담가 먹는 거요"


나는 어르신의 김치행복론이 이렇게 해석된다.


"행복은 대단한 것이 아니랍니다. 행복한 소소한 것이지요. 지금 일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기쁜 일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것을 바로 지금 해보세요. 그럼 행복해져요. 복된 운도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작은 기쁨을 발견하게 되면 그건 복된 운을 만난 거죠. 일상 속에 행복의 비법이 숨어있어요. 매일이 행운이고, 매일이 행복일 수 있어요."


아직도 살림에 서툰 나이지만, 몇 달 전부터 김경순 어르신의 김치행복론이 생각나서 자꾸만 김치가 담그고 싶어 진다. 마치 김치를 담그면 행복이라는 보물 하나를 운 좋게 소유하게 될 것 같아 준비할 때부터 설렘이 밀려온다.


섬세하게 혀끝으로 간을 보며 양념을 만들고, 재료들을 깨끗하게 씻고 다듬어 버무릴 때, 김치통에 가득 차도록 알차게 담을 때, 내가 만든 김치의 익어가는 정도에 따라 그 맛의 변화를 느낄 때, 종종 아이들이 최고의 맛이라고 엄지 척을 날려줄 때, 다음엔 또 무슨 김치를 담가볼까 생각할 때 조차도 김경순 어르신의 김치행복론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일. 행복은 달콤 쌉싸름한 풍미를 갖고 있다.

이. 행복은 나의 일상에 널려 있다.


이 두 가지가 나의 행복론이다.


p.s. 반쪽짜리 주부인 내가 김치 담그는 일에 용기를 낸 건 모두 김경순 어르신 덕분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그분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는 어떤 행복론보다 소중하게 나의 가슴에 남아있다. 이런 기억이 사회복지사로서 느꼈던 최고의 경험, 나만의 이야기인 것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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