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관통한 도전
나에게 중요한 정서를 꼽으라면 불안이다. 불안은 '녀석'이라 만만하게 칭하기에는 불편해서 '님'이라 불러주어야 할 것 같다. 오랫동안 불안과 함께해 온 나는 불안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불안이 주는 지혜를 삶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좋은 점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불안은 함부로 다가가면 기습 공격을 일삼아 고통이 되지만 겸손하게 대하면 유익이 된다.
불안의 첫 모습: 불편과 불안 사이
돌이켜 보면 불안의 첫 모습은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으로 다가왔다. 주변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 정리되지 않은 것을 불편해했다. 해야 할 용무들에 대해서는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닥쳐서 나오는 괴력 따위는 내게 없었다. 특히, 학창 시절에 시험 준비할 때 내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이 할당되지 못했을 때는 그때부터 전율처럼 타고 오는 긴장감은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불안이 가르쳐준 지혜 1 : 충분한 시간을 두고 준비하라.
나는 뭐든 '미리미리'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을 할 때 약속한 기한을 넘기거나 딱 맞추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기한을 넉넉히 앞두고 완료하고 반복 검토해서 기한 전에 제출한다. 시간의 압박이 주는 효율을 한껏 누리면서 일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참 신기하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으로 저렇게 살아가나 싶어 존경심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오며 축적된 나의 경험으로는 결과의 질적 차이에서 나의 성과물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은 내게 중요하게 작동되지 않는 기제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준비하는 자세를 가동한다. '미리미리'는 시간을 농축하여 정성을 담는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이것이 노력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시간이 주는 압박의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 작동되는 사전 준비자세는 불안이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생활 속의 지혜이다.
불안이 가르쳐준 지혜 2 : 소유를 통제하라.
사람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 공통적으로 하는 한마디가 있다.
"집이 굉장히 심플해요."
"아이 셋 키우는 집 맞아요?"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장난감이나 아이들 용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었던 적이 없다. 모든 물건들은 제각각 '자기 공간'을 점하고 있어야 한다. 모든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어야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물건을 특별히 애정 하지 않는다. 나에게 애정의 대상은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막내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작품이라고 하는 것들도 웬만한 건 우리 집에서 공간을 점할 수 있는 유효기간은 이틀을 넘지 않는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옷의 부피도 커지고 있지만 다행히 각자의 기호가 명확해서 종류가 줄어서 총량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다.
추억 때문에, 손떼가 묻어서, 비싸게 주고 샀는데, 그때 이뻤는데......
모두 소용없다. 시간이 지나 퇴색된 가치를 돌이킬 수 없다면 흘려보내는 것이 낫다.
결론적으로 나는 잘 버린다.
불안을 대할 때 통제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만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자잘한 연민으로 곁에 남겨둔 물건들도 양이 많아지면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 살아가면서 불안은 지뢰밭처럼 숨어있고 나의 에너지 수준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니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정리하며 사는 것이 좋더라는 거다. 이건 마치 여행길에 적절한 짐을 싸서 가는 지혜와도 같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인생 여행길이고, 나는 불필요한 것에 압도되어 불안하고 싶지 않다. 통제 의식을 가동하지 않은 채, 나의 소유 바구니에 마구 담기만 하면 압도당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물론 각자 자신의 에너지를 배분하여 살아갈 테니 생활양식에 따라 선택의 범위가 있긴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물건에 대한 에너지 투입을 극도로 낮추어 사는 사람이다. 그 정도만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가르쳐준 지혜 3 : 과업에 시간의 이름표를 불여라. 3초, 3분, 30분, 3시간, 3일, 3주, 3달
나는 물건에 배분된 에너지 수준이 낮은 반면, '활동'에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할당하며 살아간다. 의도한 적 없이,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겨먹은, 신이 창조한 '나란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부단한 적응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가끔은 나도 내가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생겨먹은 대로의 나를 거스를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이 사회관계 속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에 대한 경험치가 증가하게 되면서 비로소 나도 이런 내가 받아들여졌고 좋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가끔은 불편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나에게 불안은 아무것도 못하게 정지상태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여러 모습, 여러 역할로 넘치는 에너지를 뿜어내며 살게 만드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나란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불안은 정적인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 움직이는 활동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야만 가치있다고 인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살다 보니 삶이 고단하다. 하는 일의 종류가 많아서 압도될 판이다. 그런데 물건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포기했지만 이 활동의 영역은 절대 양보할 수가 없다. 그러니 무조건 살아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유용한 방법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에 시간의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어떤 일을 앞두고 있을 때, 나의 뇌는 신경회로가 작동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특히, 낯설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뇌를 자극하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 시간의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다.
'아~ 이 일 참 귀찮네. 누가 대신해 주면 좋겠다.'라는 단추와 '아! 이 일은 30분만 집중하면 해결될 일이야.'라는 단추 두 개가 있는 것이다.
이 둘 중에 후자의 버튼을 고민 없이 눌러버리면 그때부터 몸이 움직이고, 감정은 가벼워지고, 생각은 명료해진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살아오면서 얻은 중요한 교훈이 하나 더 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예상했던 시간의 이름표보다 대부분은 더 빨리 종료가 된다는 거다. 즉,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뇌가 만들어낸 판단은 오류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숫자로 시간의 이름표를 명령하면 뇌는 엄청나게 활성화되고 마치 그 숫자에 지배받은 듯 목표를 향해 질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3일까? 어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답을 하긴 어렵다. 다만 1에서 9까지의 숫자 중 비교적 앞선 숫자라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5는 정 중간에 있어서 뭔가 불편하고 그 이상의 숫자는 나의 인내의 범위를 넘어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연년생 남매가 티격태격 싸우는 장면을 보았을 때 참을 인을 3초만 견디면 그럭저럭 가라앉는다. 이렇듯 3이라는 숫자는 작지만, 아주 작지는 않아서 내게는 충분히 넉넉함으로 다가온다.
불안을 가르쳐준 지혜 4 : 일반성과 특수성을 빠르게 판단하라!
나의 불안은 익숙함을 추구하고 낯섦을 싫어한다. 새로운 모든 것은 나에게 스트레스 요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불안님'과 함께하며 나도 모르게 반복해 온 행동이 있다. 그것은 장(Field) 또는 맥락을 살피고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의 단서를 찾는 일이다. 이 일을 한 두 번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지금껏 무수히 해왔다고 생각해 보시라. MBTI로 말하자면 직관이 엄청 발달하게 된다. 직관이 작동한다는 것은 세상이나 사물, 사람 등등을 인식할 때 큰 그림을 그려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의미이다. 큰 그림 속에 구체적인 단서들이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거다. 물론 여기에서 직관으로 만들어낸 내가 본 큰 그림이 항상 진실이고 옳은가에 관한 질문이 든다. 하지만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래야 속이 풀리고, 편안하다. 내가 그린 그림이 알고 보니 오류 투성이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이미 나의 불안이 싫어하는 '낯 섬'은 '익숙함'으로 의미의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일반성과 특수성을 빠르게 판단하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 여러 단서들을 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무수히 하다 보면 나에게 일반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범주의 것이 있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낯선 것들은 특수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런 판단을 빠르게 하고 나서야 나는 다음 단계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만약 특수성을 마주한다면 납득이 될 때까지(다른 말로 큰 그림이 그려질 때까지) 지켜본다. 낯설지 않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긴장을 풀고 편안해진다. 이럴 때 나는 원래 내가 갖고 있는 장점들을 노출시킬 수 있게 된다. 안전한 환경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을 탑재한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열심히 맥락을 살피는 것은 내가 사회관계에서 언제 가장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빨리 편안해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산다.
불안을 넘어서서 :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끌림, 도전
내게 불안이라는 정서가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불안님과의 동고동락한 지도 30년쯤 되는 것 같다. 어려서는 주로 불안은 무섭고 불편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름 생활 속 지혜들을 발동시키면 여전히 불안과 함께하지만 꽤나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일탈을 꿈도 꿔보지 않은 내가 마치 오춘기를 맞이하듯, 불안을 중심에 두고 이것을 넘어서는 시도가 하고 싶어진다. 완벽하게 깜깜한 동굴과 같은 곳으로 여전히 나를 압도할 수도 있는 불안이 함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디뎌 볼 용기를 내보고 싶다. 수영도 못하는 내가 갑자기 깊은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은 무모함이 아니다. 이제 익숙하게 느끼는 것들을 향해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낯선 세계, 낯선 경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용기를 갖고서 더욱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깊게 사색해 왔고, 나에게 꼭 맞는 인생사용기술서를 몸에 익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사하게도 모든 것은 불안을 통해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