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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쓰레기통

이젠, 검정 비닐봉지로 바꿀 때가 됐다.

by 자유인

우리 집엔 쓰레기통이 따로 없다. 더럽고 지저분한 찌꺼기를 받아주는 쓰레기통이 고마울 법도 한데, 쓰레기통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살짝 거슬렸다. 그게 싫어서 한 때는 디자인이 예쁜 쓰레기통을 사다 놓기도 했다. 지금은 싱크대에 걸어둘 수 있는 도어 훅 두 개를 사서 거기에 검정 비닐봉지를 걸어둔다. 하루 동안 받아낸 쓰레기는 저녁 설거지를 마무리할 때 묶어서 바로 정리한다. 식구들이 버려놓은 온갖 쓰레기들을 속으로 담아내던 예쁜 쓰레기통의 역할을 검정 비닐봉지 하나가 대신하는 거다. 주방에 들어서면 턱 하니 버티고 있는 검정 비닐이 남 보기에는 나빠도 내 마음은 가볍게 한다.


이 편안함은 뭘까? 생각해 보니 쓰레기통을 사용할 때의 여러 불편들이 없어졌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아도 쓰레기통은 쓰레기통일 뿐이다. 각종 찌꺼기들이 이래저래 섞여 있고, 때론 악취도 난다. 어차피 나와는 작별해야 하는 것들이다. 예쁜 데 담아두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그냥 아주 쉽고, 가볍게 대하는 게 훨씬 낫다는 걸 검정 비닐을 사용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의 카톡 프로필에는 '작은 것도 소중하게!'라는 나를 소개하는 멘트를 넣어두었다. 맞다. 작은 것도 소중하게 다루고,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도 가치를 발견하는 시선은 귀하다. 그렇다고 버려져야 할 것들까지 소중하게 다룰 필요는 없다. 그 가치를 잃어버린 것들은 얼른 정리하고 가볍게 사는 것이 속 편한 일이다.


버리는 작업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아마도 마음이 아닐까 싶다. 가끔은 악취 나고 손 대기 싫고 시선조차 주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내 마음에 찾아올 때가 있다. 불안, 두려움, 분노, 짜증, 귀찮음, 미움, 설움, 억울함, 분개 등등의 감정들과 셀 수도 없이 가지 쳐진 생각들까지. 일단 마음에 들어서면 왜 귀한 손님 모시듯 하는 건지. 귀한 손님과 불청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데, 예의 없는 불청객에게까지 공손하게 대할 것인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언젠가부터 집 안에도 없는 쓰레기통을 내 마음에 들여놓았다. 집 안에는 비닐봉지 하나로 하루를 정리할 수 있지만 내 맘 속에는 더 크고 튼실한 쓰레기통을 들여놓은 것 같다. 거기다 내 속에 담아두기에는 불편한 기억, 생각, 감정, 메시지들이 있으면 미련 없이 던져 버린다.



"괜찮겠어?" 따뜻한 느낌이지만 불안을 가져다준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합리적인 조언 같지만 선택에 혼란을 줄 뿐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당신의 그 경험이 내게 왜 그렇게 중요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등등등



실상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쓰레기인지, 보물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선의로 가득해 보이지만 실은 나를 통제하려 드는 타인의 말들, 안전과 평화를 주는 것 같지만 도리어 변화와 성장을 차단하는 것들도 상당히 많다. 알고 보니 내 마음이 사람과 물건에만 정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버릴까 고민하는 것들 중에는 버리고 나니 의외로 개운할 것도 많다. 문제는 미운 정도 정이라고 버리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물건을 살 때도 '제 값'이라는 게 있듯,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제각각 서로 다른 '제 값'들이 있다. 이런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살면 자칫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일단 버릴 것은 버려야 빈 곳에 여유가 생기고, 새로운 아름다운 것들이 들어찰 기회도 있다. 미움이 버려져야 용서가 있고, 두려움이 버려져야 도전이 찾아온다. 이유 없는 불안도 갖다 버려야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물론 잘 버리며 살다가도 가끔 이름 모를 병이 도지면 쓰레기통을 뒤져 보는 어리석은 짓을 할 때도 있다.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찾듯 속을 끓이며 쓰레기통을 엎어 난장판을 만드는 것이다. 오전에 걸어두었다가 저녁에 질끈 묶어 완전히 보내버리듯 이제는 마음속 쓰레기통도 바꿔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크고 튼실한 쓰레기통에 대한 미련부터 버려봐야겠다.



사진: Pexels에서 trash bag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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