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딱 거기까지야. 난 딱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안정적인 게 좋아. ‘적당히’를 넘어서면 내가 불안해져.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드라마 『기상청 사람들』 中 진하경의 대사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은 기상청의 총괄 2과에서 벌어지는 진하경 과장과 부하 직원 이시우 연상연하 커플의 사내연애를 주축으로 남녀 연애사를 그리는 드라마이다. 평소에 드라마를 볼 시간도 없었고, 엇비슷한 플롯으로 시선이 가는 연예인들을 캐스팅해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드라마들에는 큰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진하경의 저 대사 때문에 전후 맥락이 궁금해졌고, 드라마의 줄거리를 좇아 16회분의 드라마를 즐겁게 탐독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목에서 : 과연 인간은 극한의 가치로운 것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인본주의 심리학자 Maslow는 자기실현은 인간이 소유한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려는 동기라고 설명하며 이것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라고 보았다. 자기실현은 삶을 이끌어 가는 주된 동력이자 개인의 인생행로를 결정하는 중심축이기도 하다. 또, 자기실현은 무언가를 향한 강한 이끌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향해 뚜렷한 목표의식과 열정으로 점철된 부단한 인내의 과정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모든 인간은 고귀한 선, 정의, 사랑, 아름다움 등 극한의 가치로운 것을 추구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가? 인간에게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려는 동기가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정답은 “YES!”여야 할 것 같다. 과연 그러한가? 다시금 의문이 든다.
진하경의 대사는 나의 비범해 보이는 질문에 “NO!”라고 외치는 세상 속 군상들의 일면으로 보인다. 전후 맥락은 이렇다. 진하경은 대학시절부터 10년이 넘게 연애를 하던 남자 친구와 기상청에 함께 근무했고, 일에서는 똑 부러진 성향을 가졌고 승진 가도를 달리는 능력 있는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결혼을 코앞에 두고 남자 친구의 배신으로 파혼을 하고 다시는 사내연애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연애에서의 사랑의 감정이 이성적인 결심으로 통제되지는 않는 법! 뜻밖의 인물인 부하 직원 이시우와 전에 없던 깊은 사랑을 느끼며, 이전의 혼란이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남자 주인공 이시우는 도박중독의 아버지 슬하에서 슬픈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그려진다. 성인이 된 그는 어느새 비혼주의자가 되어 있었고 사랑하고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그의 인생계획에 없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두 남녀의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감정이 깊어지는 장면들이 드라마의 중반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관계에도 먹구름이 끼고 관계의 깊이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두 주인공은 동시에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시점에서 술 취한 진하경이 이시우를 앞에 두고 자신의 진심 어린 속내를 밝히는 대목이 나온다.
“난 딱 거기까지야. 난 딱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안정적인 게 좋아. ‘적당히’를 넘어서면 내가 불안해져.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이 대사를 들으며 나는 Maslow의 ‘자기실현’을 떠올렸다. 인간에게 자기실현의 본성이 있다면 그 반대에는 ‘적당히’ 살고 싶은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난 딱 거기까지야.”를 반복하며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확신을 만든다. 자기실현한 사람들의 수가 실증연구에서 1% 정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적당히’가 갖는 에너지도 꽤나 강력한 것 같다.
다시 내가 던진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인간은 극한의 가치로운 것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극한의 가치로운 것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것을 무력화시키려는 강력한 에너지도 우리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자기실현’과 ‘적당히’의 줄다리기 : 불안과 두려움에 대하여
실제로 Maslow는 인간은 가장 뛰어난 면, 우리의 능력과 재능, 추진력, 창조성이 발휘되는 상황을 ‘미지의 것’으로 여기고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때 욕구 위계에 있어 안전의 욕구가 안정적으로 충족되었던 경험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안전을 담보로 현재의 평온함을 깨고 소스라치게 엄습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실존적 개인에게는 매우 위협적이다. 이 불안과 두려움은 갖가지 확신과 신념들을 생산해 내고 그 확신을 따르지 않는 것은 어리석고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내 삶에 침투했던 불안과 두려움의 경험은 떠올리자니 두 가지 상황이 떠오른다. 첫 번째는 결혼이다. 드라마에서 이시우가 비혼주의자가 된 것이 나는 이해되기도 한다. 나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한부모 가정에서 어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비교적 오랫동안 부모님의 이혼은 나의 약점 중 하나로 인식됐고 나도 모르게 안정적인 부부관계를 일평생 유지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며, 내가 과연 그럴만한 역량이 있는지 의심하며 혼란을 경험했다. 남편의 프러포즈를 받고 6개월 동안 알 수 없는 소화장애를 경험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던 건 아마도 불안과 두려움이 신체증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런 내가 결혼에 관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였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존재, 바로 나’에 대한 의식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게 되었을 때였다.
두 번째는 교수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의 여정이다. 교수 임용의 좁은 문을 과연 내가 뚫고 갈 수 있을지 불안해할 때, 주변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니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조언도 있었다. 그보다 좀 온유하게는 실패하더라도 괜찮으니 멀리 보고 천천히 가라는 조언들도 많았다. 어떤 외풍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내 안에서 누르면 움트기를 반복하는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목표를 이룬 지금, 무엇이 가능으로 이끌었나를 생각해 보면 남편의 한마디였다. “멈추지 않고 될 때까지 하면 무조건 이루어진다!” 실패할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설정한 목표를 현실로 만드는 귀한 동력이 되었다.
내 인생행로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냈던 것은 용기 덕분이었던 것 같다. 용기라는 내적 자원은 이미 내 안에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소생하는 에너지이다.
절정 경험 :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
다시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의 진하경의 대사에 주목해 보자. 진하경은 ‘적당히’의 선을 넘으면 불안해지고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드라마여서 가능한 대사였을까? 나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불안의 본질적인 의미가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식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인간은 현재의 ‘나’에 익숙하고 어쩌면 인생 여정의 다양한 경험에서 ‘나’라는 옷을 조금씩 수정하며 ‘지금’ 내게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수정을 가한 ‘나’라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돌변할 수 있다는 가정은 나의 모든 시간과 지금까지의 존재의 이유, 삶의 여정을 부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이것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나의 지위를 완전히 바꿔 놓으신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현재의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대단한 축복의 사건이다. 이것은 대단한 반전이다.
Maslow가 설명한 절정 경험은 인생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매우 기쁘고 흥분되는 감격의 순간,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찾아오는 찰나의 경험일 수 있지만 내 삶에 잊히지 않는 가장 강력한 기억이 되어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이전과는 다른 인생의 목표의식을 갖고 사랑과 조화, 통합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하면서 인류에게 보편적인 절정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닐까 싶다. 복음은 한 사람의 신분을 바꾸고 존재의 의미를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일상 속으로 : 미지의 세계로
드라마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진하경과 이시우는 ‘아주 사랑한다’는 이유로 벽에 부딪혔던 애정전선을 회복하고, 부모님의 상견례 자리가 마련되는 것으로 보아 비혼주의자였던 이시우도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온다. 흔히들 말하는 유리천장은 사회적인 관계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유리천장은 내 안에 존재한다. 제자리걸음 하던 애정전선도 자기 안에 존재하는 더 큰 사랑을 깨닫자 두려움을 몰아내고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결혼은 나와 무관해 보이던 것이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미지의 세계로 초대하는 일상의 손길은 언제나 상존하지만 그 손을 잡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바로 내가 만든 장벽이다.
자기실현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간명하게 요약될 수 있다.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는 어둡고 깜깜해 보이지만 신비롭고 놀라운 길이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고, 전혀 다른 나로 변화할 절호의 기회를 선물한다. 나의 일상이 미지의 것으로 가득 차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그 여정에 늘 함께 하실 하나님께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