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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기숙형 대안학교로 보내다

by 자유인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기숙형 대안학교에 입학을 한다.

다음 주면 새 학기가 시작되고 이번 주 일요일 저녁이 되면 다시 기숙사로 들어간다.


얼마 전, 입학할 학교에서 3주간 프로그램이 있다길래 딸에게 입학 전 준비가 되겠다 싶어 보내 보았다.

13년을 키우는 동안 아이와의 전화통화조차 자유롭지 않은 이별은 처음이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따뜻하지도 소소하게 마음을 많이 쓰는 엄마의 유형은 아니다.

심지어 밖에서 일을 할 때는 아이 생각은 접어두고 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기숙학교에 보내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이슈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이가 잘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이 정도 든든함을 가질 정도로 자라준 것이 고맙고 기특한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웬걸.

지금까지 교회캠프로 1박 2일 두어 번 떨어져 본 게 고작이었고

딸아이와 떨어지는 엄마로서의 훈련도 딱 그 수준이 다였다.

아이를 기숙학교로 보내고 이틀째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평소 엄마는 일을 하면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는 핀잔을 받았던 내가,

아이의 스케줄을 보며 이제나 저제나 딸아이에게서 전화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단체 생활이 힘들진 않을지,

공교육에서 빠져나와 대안학교의 교육시스템이 과연 아이에게 괜찮을지,

딸아이의 빈 침대를 볼 때면 너무 빨리 아이를 떠나보내는 건 아닌지,

이랬어야 했는... 저랬어야 했는데...

정답도 없는 육아와 교육에 대한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캠프가 시작되고 1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익숙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고

딸아이다 싶어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한 마디만 정확하게 하고는 이어서 울기 시작했다.

지금껏 세 아이를 키우면서 불안과 걱정이 없지 않았지만

늘 긍정회로를 돌리며, 담대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워왔다.

그런데, 딸아이가 우는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근심이 가득해졌다.

'분명 큰일이 있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옆에서 궁금해하던 남편은 아이가 운다고 했더니

"엄마가 보고플 땐 엄마 사진 꺼내놓고~

엄마 얼굴 보고 나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니 내 어머니 사랑하는 내 어머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육아에 관해서는 남편은 가장 좋은 대화 상대자였고

가치관과 교육방향의 싱크로율이 높았다.


바로, 이 순간!

나는 걱정, 염려, 불안으로 가득한데

남편은 원래 집 떠나면 엄마 목소리 들으면 눈물이 나는 거라며

전혀 공감하지 못할 말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게 읊어 대는 것이 아닌가!

아주 고약한 사람이다.


10분 넘게 통화를 하는 동안 내가 들은 것은 아이의 우는 소리뿐인데

남편은 심각한 일 없으니 이제 편하게 지내란다.

우는 아이 목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된다며

걱정할 일이 생겼으면 그 얘기를 했을 거라며

잘 적응하는 줄 알면 된단다.


엄마인 나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군생활 이야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며

아이와의 재회의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3주간의 캠프 기간 중, 또 한 번의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매우 또릿한 목소리로

엄마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를 자신의 일정에 대한 안내 전화였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캠프 마지막날, 먼발치에서 지켜본 아이는

함박웃음으로 친구, 언니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무엇인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를 가득 안은 표정이었다.


아이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아침에 눈떠서 잠들기 전까지 세세한 일정과

어떤 동료들을 만났고 어떤 낯선 경험을 했는지

무엇을 배웠고 어떤 기대가 생겼는지 쉴 새 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참 예사롭지 않은 부모를 만나서

거친 벌판에 너무 이르게 아이를 내어 놓은 것이 아닌가

고민했던 나의 염려는 진정 나의 몫일뿐이다.


아이는 부모라는 환경도 자기 앞에 펼쳐지는 더 광활한 환경에도

용기 있게 순순히 새로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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