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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오리의 물갈퀴를 찢으셨나요?

by 자유인

얼마 전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DICS: Disciple International Christian School)에서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초등 저학년 학생들이 배우가 되고 뮤지컬 전문가에 의해 연출된 무대였다. 막내가 마침 초등 1학년이라 귀여운 나무요정이 되어 무대에 섰다. 나름 International School인지라 영어 뮤지컬이었고, 제목은 'The Reeves Animal School'이었다.


뮤지컬의 원작은 교육학자 R.H. Reeves의 동물학교인데, 일부의 내용을 극화하였다. 동물학교에서는 진급을 위한 원칙이 있는데, 달리기, 날기, 수영, 오르기 과목을 모두 우수하게 해내야 진급이 가능하다. 이 진급 지침을 따르자니, 다람쥐는 오르기를 잘 하지만 날기를 못해서 걱정이고 오리는 수영을 잘 하지만 달리기를 못해서 걱정이다. 모든 동물들은 제각각 가장 잘하는 것이 있지만 온통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뮤지컬의 하이라이트는 오리 에피소드다. 오리는 자신을 잡아먹을 법도한 치타에게 간다. 이런 오리의 용기를 생각하면 대단하다 싶다. 그런데 오리가 아무리 엄청난 용기와 열정으로 달리기를 배워도 한계가 있다. 한참 오리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던 치타는 다리를 찢지 않고는 도저히 잘 뛸 수 없을 거라며 가르침을 포기하고 가 버린다. 치타의 반응에 오리는 좌절한다.


어느덧, 진급을 위한 수영 시험 날이 다가왔다. 뮤지컬의 클라이맥스는 수영에서는 항상 1등을 하던 오리가 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힘을 잃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미침내 동물 친구들은 오리에게서 물갈퀴가 없어졌음을 발견한다. 관객으로 앉아 있던 나도 '그래, 치타에게 가서 달리기를 배우는 오리의 열정이었다면 물갈퀴를 찢으면서까지 수영을 잘하고 싶었겠다' 하는 마음에 아이들의 연기에도 짠한 마음이 들어찼다.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도 스치지만 동물학교의 규칙대로 살아가자니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매우 잔인하다.


도대체 누가 오리의 물갈퀴를 찢은 걸까?


원작자인 R.H. Reeves는 이 작품을 통해서 동물들은 신이 창조한 목적대로 살아갈 때 가장 우수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물론,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열정과 창의성을 가진 존재이며, 신의 오묘한 창조적 섭리가 깃든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극단적으로 한 곳(주로는 의대)을 향해 모두가 질주하는 상황을 보면 동물학교보다 어쩌면 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아이 셋을 키우지만 때때로 나와 남편에게서 어쩌면 이렇게 다른 특성의 아이들이 나왔나 싶어 놀라곤 한다. 커갈수록 제 색깔을 드러내는 걸 보면 양육은 날마다 새로운 날들을 선사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가정, 학교, 사회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장이다. 가정에서 부모님은 매일 공부 잘해서 의대를 가면 좋겠다고 하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정해진 과목의 성적대로 줄을 세운다. 사회는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킬 타자의 자본욕망은 거대한 사교육 시장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에서는 '진정으로 원하는 네가 되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유혹의 메시지를 던진다.


맞다. 누구든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상의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는 아이들 스스로 그 중요한 무엇을 결정할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바로, 지금-여기에서 무엇을 원하니? 묻는다면 아이들은 쉽고 편하게 즐거운 것들, 일상의 버거운 고통을 해소해 줄 것들을 선택하기를 원할 것이다. 이런 선택들은 '진정한 나'에 대한 고민에 대한 해답도 아니고, '진정으로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한 답도 아니다. 아이들은 어쩌면 쉼이 필요하다고 절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쉼은 다른 무엇인가를 향한 잠시 동안의 충전일 뿐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아이들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어딘가로 내달리고 있다. 이 질주는 부모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길 위에서 이루어질 뿐, 웬만큼 독(특) 하지 않고는 이탈이 불가능하다.


나는 가끔, 세 아이를 대안학교로 보내는 이 일이 대단한 이탈 혹은 탈선이 아니었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남들이 모두 가는 길은 아이들은 고단해도 부모는 편할 수 있다. 남들이 알려주는 다양한 정보들에 귀를 기울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요령들도 쉽게 배울 수 있고, 심지어 맞벌이라도 어느 정도의 돈을 투입할 각오만 하면 충분히 괜찮은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길을 포기한 것은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여기에는 자녀들을 향한 나의 기대와 욕심을 철저히 포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대신,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천부적인 재능과 존재의 목적을 찾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내게 자라났고, 혼란스러운 사회가 주는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도록 진정한 보호자의 역할을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오리의 물갈퀴가 찢기기 전에 부모로서 나의 기대와 욕망을 찢어 버리는 이 일을 나는 한 번만 하지 않는다. 매일 같이 새 마음으로 아이들 앞에서 나의 부모 됨의 욕망을 내려놓으려 애쓴다. 그래야 아이들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전혀 다른 삶의 이유와 방법들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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