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집사는 라단의 처서로 가, 누워 있는 라단 옆에 앉
아, 화로에 잎사귀를 더 넣는다.
사울진은 며칠 동안 머리가 아파 누워 있으면서, 곰곰
이 생각해 보았다. 왕비, 마데라, 혼례를 준비하는 하갈
전과는 좀 달라진 아들. 물론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
하겠지만, 사울진은 아들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 왕과 왕비는 마데라에 갔다가, 옷감
집 주인과 함께 하갈집으로 갔다고 했다. 그동안의 일
들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다. 혼례식이 다
가오고 있고, 라단은 혼례복이 맘에 안 든다고 불평하
고 있는 중이다. 혼인이 하기 싫어서, 또 핑계를 대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사울진은 그런 아들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상시와 똑같이 억지
도 부리고 불평도 하지만, 그가 하는 일들을 미리 알린
다는 것이다. 왕이 된 후 변한 아들이라면, 왕비 될 사
람과 같이 가겠다는데, 다 알리고 가야 하냐고 말하거
나 아니면, 싸늘한 얼굴로 대꾸조차 하지 않다가, 혼인
이고 뭐고 다 그만하겠다고 생떼를 부려야 하는 게 맞
는데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주고 알려 주고 있다는 것
이다. 그래서 사울진은 아들이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직감
적으로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돌아온다면 가장 어수선하고 정신
없는 라단의 혼례식일 것이라 짐작했다. 왜냐 하면 왕
비는 하갈이 자주 드나들던 옷가게 주인 딸이라고 했
으며, 이들은 혼례의복으로 자주 만남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만나기에 적당한 이유와 장소가 될 것이다.
그다음 사울진이 생각한 것은, 그들이 어디로, 어떻게
올 것인가였다. 템말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조용하
고, 마데라의 분위기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울진은
제사장을 생각하다가, 그때 카야가 리만투어로 사라진
날을 기억했다. 제사장이라면 리만투어로 올 수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리만투어는 마을과 떨어져
있으니 그곳으로 온다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
고, 변장을 하고 마데라로 온다면, 일반 마을 사람들 속
에 섞여 그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
다.
사울진은 누워있던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그동안 아팠던 머리까지도 개운해
지는 것 같았다.
“그래. 그거였어. 하하하.”
밖에 서 있던 웃날이 사울진의 웃음소리를 듣고 방으
로 들어오자, 사울진이 웃날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으
며, “내가 알아냈어. 바로 그거였어. 웃날. 하하하. 내가
누구인가? 사울진이 아닌가.”
사울진은 본래 타고나기를 총명하고 영특한 자이다.
그동안 그의 명석한 머리와, 부지런함, 그리고 기색과
기개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사울진은 혼인식 전날인 어젯밤 라단을 매향초로 재웠
다. 그리고 무사들을 시켜, 하갈과, 마데라 옷감집 주
인 그리고 왕비를 잡아다 리만투어 해안가에 나무 기
둥을 만들어 매달았다. 예상대로 그들은 리만투어로
왔고, 이 기회에 그들을 모두 없애려 했지만, 제사장의
리만투어를 다루는 능력을 이겨 낼수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템말산도 계속 주시했는데, 조용했었다. 라함
이 어떻게 왔는지, 뒤에서 공격한 라함과 이들의 병사
의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도 변수 였다.
궁으로 돌아온 사울진은 웃날을 그의 처서로 데려가
방에 눕히고, 급하게 의원을 부른다. 그는 생각보다 상
처가 깊고 피를 많이 흘린 상태이다.
급하게 방으로 들어오는 의원에게 사울진은, “반드시
치료해. 필요한 약재는 빠짐없이 말하고, 내가 전부 구
해 올 테니.”
의원이 웃날을 치료하는 동안, 사울진은 눈을 감고 생
각을 정리한다. 이들을 빠른 시일 내에 없애야 하고,
라단이 잠든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처리해야 한다.
웃날의 최 측근 무사, 윤다를 부르더니, “마하살은 어
떻게 됐어?”라고 묻는다.
사울진은 병사를 마하살 집으로도 보냈었다.
카야와 여람이 마하살 집으로 황급히 달려가자, 멀리
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레이와 마하살이 병사
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레이가 소리친다. “덤빌 테면 덤벼봐라. 내가 이렇게
는 안 죽어. 내 아들의 원수와 내 지파 사람들의 원수를
꼭 갚고 죽을 테니.”
웃날의 최측근 무사가 고개 짓을 하자, 병사들이 칼을
빼들고, 레이와 마하살을 향해 돌진한다.
그때 하늘에서 화살이 우수수 떨어지며 돌진하는 사울
진의 병사들을 맞히자, 병사들이 쓰러진다. 화살이 날
라 오는 곳을 바라보니,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달려온다.
여람이 달려오며 외친다. “엄마. 아빠.”
소리를 듣고, 마하살과 레이가 서로를 쳐다본다.
마하살이 놀랍고 반가운 목소리로, “여보. 여람이 같은
데? 맞지?”
“네. 여람이 인 거 같아요. 우리 여람이가 왔어요. 여람
아. 여람아.”
“엄마.”
마하살과 레이는 힘을 내어 웃날의 병사들에게 맞선다
여람과 카야도 병사들과 함께 매섭게 돌진해 오며, 사
울진의 병사들을 쳐낸다. 한동안 싸움이 일어나고, 잠
시 후 정적이 감돈다.
여람은 마하살과 레이에게 달려간다. 셋이 서로 부둥
켜안고 만남의 기쁨으로 흐느낀다.
레이가 여람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널 다시 못 보는
줄 알고, 이 자리에서 저들을 다 죽이고, 왕궁으로 쳐들
어가 그들도 모두 없애려고 했어. 아들. 어디 보자. 다
친 곳은 없고. 안 본 사이에 훌쩍 컸네.”
여람이 손으로 레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한다. “헤어
질 때도 이미 커 있었는데요.”
여람의 농담에 마하살과 레이가 웃음을 지으며 여람을
다시 한번 찬찬히 본다. 그들의 눈에는 다 큰 아들이
었어도, 늘 철없고, 개구쟁이 같았는데, 이제는 성숙하
고, 다부져진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하고, 기특하면서
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집을 떠난 그가 어떻게 지냈는
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찡하다. 여람도 그들을 보면서,
걱정으로 생긴 얼굴의 주름에 마음이 찡하다.
카야가 그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는 말한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사엘의 집으로 돌아온 레이와 마하살이 라함을 보고
놀라 달려간다.
“살아 계실 줄 알았습니다.”
“마하살. 자네를 이렇게 다시 보다니.”
마하살과 라함이 포옹을 한다. 사엘과 수아도 달려 나
오자, 마하살이 이들을 포옹하며 말한다. “나는 너네들
이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어.”
여람이 서로 반가워하고, 포옹하는 이들 사이로 사엘
을 바라본다. 여람과 눈이 마주친 사엘이 잘했다는 눈
짓을 하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하지만 사엘의 머릿속
은 복잡하고 마음이 불안하다. 이제 집으로 왔는데, 밧
세는 다쳤고, 라단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은 순식간에
둘로 나뉘었다. 언제 또 싸움이 시작될지 알 수 없다.
카야가 사엘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의 옆으로 다가
와 말없이 서 있는다. 이를 알아챈 사엘이, "카야가 말
해 주지 않았으면, 마하살님과 레이님도 못 구했을지
몰라. 그나마 다행이야."
“내일은 무사들과, 왕궁에 들어가 볼게요.”
“안돼. 너무 위험해.”
“그래도 그쪽에 가봐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있
을 거 같아요. 라단님도 찾아봐야 하고…” 카야가 말을
잇지 않고 사엘을 바라본다.
사엘은 라단이라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깊은 한숨을 내 쉬다, “안돼. 지금은 너무 위함해. 좀 지
켜 보자.” 라고 힘든 마음으로 말한다.
“웃날은?”
웃날을 살핀 의원에게 사울진이 다그치며 묻는다.
“팔의 상처는 치료했지만, 칼이 팔을 관통하면서, 가슴
을 찌르 셨습니다. 오시는 중에 피도 너무 많이 흘리 셔
서, 지금은 좀 더 지켜봐야 할거 같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 그런데 뭘 지켜봐? 어서 약초라도 먹
여야지.”
“지금 의식이 없으신 상태라, 깨어나실 때까지 지켜보
고, 그 다음에.”
사울진이 말하는 의원의 멱살을 잡자, 의원이 숨이 막
혀 말을 잇지 못한다. “뭘 자꾸 지켜봐. 지켜볼 거면 내
가 왜 너를 불렀겠어. 지켜보지만 말고, 네 피라도 짜셔
고쳐 내라고.”
의원이 숨이 막혀 캑캑 거리며 말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피 범벅이가 된 병사가 비틀 거리며, 달려온다. 이
를 본 윤다가, 상황을 알아보고는, 방으로 들어와 사울
진에게 말을 전한다. “마하살 집에 보낸 병사들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들은?”
“살아서.”
사울진이 윤다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 말
을 전해온 병사에게 칼을 휘두르며 소리친다. “다른 병
사들은 다 죽었다며, 어째서 너만 살아서 돌아온 것이
야. 살았으면, 그들을 죽이고 왔어야지. 그랬어야지.”
사울진이 미친 듯 칼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는 죽
은 병사 옆에 털썩 앉는다. “이보다 더한 것도 이겨냈
지. 내가 그랬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사엘의 방 옆 작은 방에 여람, 수아, 사엘이 모여 앉아
있다. 하갈은 밧세를 돌보고 있고, 아비갈, 카야, 마하
살, 레이, 라함은 그들의 병사들을 둘러보고, 주변 경계
를 세우고,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집안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라함이 아비갈을 보며, “자네는 좀 들어가서 쉬지 그래
아까 그런 고초를 겪고 밧세까지 치료해주느라 힘들었
을 텐데.”
“괜찮아요.”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매달아 놓고, 내가 미안하네.
이곳에 자네가 다시 돌아올 때는 좀 더 안전하고 편하
게 살게 해 줄줄 알았는데.”
“이제 곧 그렇게 되겠죠. 시작이 순탄하고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모두들 이곳에 오긴 했잖
아요. 오늘.”
아비갈을 보며 라함은 생각한다. 그녀는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도, 침착하고 담대하다. 전에도 그랬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그 보다 성숙하고, 담대하
고, 침착하며, 용감했다.
“엄마.” 정하가 아비갈을 부르며 오자, 라함이 정하에
게도 괜찮은지 묻고는 자리를 뜬다.
“왜? 무슨일 있어?”
“아니요. 그냥 엄마 찾고 있었어요.”
“다른 분들은?”
“사엘님 방으로 모두 가셨어요.”
“너도 같이 가지. 나를 왜 찾아?”
정하가 말없이 아비갈을 바라본다. 아비갈은 수아, 여
람, 밧세, 사엘을 보며, 정하도 저들과 스스럼없는 친구
가 되기를 바라지만, 그들 사이에 누군가 들어 갈 곳이
없는 것을 아비갈도 느낄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은 누구
에게나 늘 친절하고, 다정하며, 친근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어울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정하도 그것을 알
고 있는 것이다.
“좀 둘러봐야 하는데, 다친 무사들도 좀 돌봐야 하고.
도와줄래?”
“치. 엄마는 내가 뭐 언제는 안 도왔어요. 그런 걸 새삼
스럽게 왜 묻지?”
아비갈은 속으로 정하가 정말 라단왕의 왕비였으면 어
땠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왕궁에 있으면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잘 꾸며진 방에 있던 정하는 정말 예쁘고 편
안해 보였었다. 라단과도 잘 어울려 보였다. 그가 차가
워 보였지만, 정하에게는 친절하고, 세심하게 챙겨주
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계획
들이라, 잠시 지나간 순간이었지만 정하가 앞으로도
그런 순간처럼 살게 해 달라 빌어 본다.
“밧세는 좀 어때?”
여람이 묻자 수아가, “아까 일어나서, 밥도 먹고 약도
먹었어. 상처도 괜찮고. 팔은 좀 지켜봐야 한대.”
여람은 심각한 수아와, 걱정하는 사엘을 생각하며, 조
금은 힘찬 어조로 말한다. “치료가 잘 됐다며, 곧 좋아
질 거야. 아비갈님께서 치료를 잘해주셔서 다행이야.
나도 오늘 엄마 아빠도 만나고. 하갈님도 무사하시고.
일단 우리 마을에는 왔다. 그렇지?”
여람의 말에 수아와 사엘이 가볍게 웃음을 짓는다.
수아가 여람을 바라보며, “너 처음으로 맞는 말 한다.”
“뭐가 처음이냐? 나야 늘 맞는 말만 하지. 네가 안 들어
서 그렇지.”
“내가 그랬나?”
“수아야. 너 왜 그래? 그랬나 하고 인정하면 안 되지.
내가 언제 그랬냐 하고 반박을 해야지. 왜 이러지? 사
엘아. 너도 수아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아?”
수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한다. “내가 지금 정상이
면 더 이상할 거 같아.”
수아의 말에 여람과 사엘도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동
안 무술과 검술 연습을 했다. 리만투어로 돌아올 때, 어
느 정도 충돌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진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고,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이
를 죽이고, 함께 한 이들이 다치고 죽어 나가는 것은 이
들도 처음 겪은 일이다.
수아가 말한다. “사울진이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어
하기야, 그때도 지파 사람들을 독초로 환각에 빠지게
하고, 나나 너희들에게도 그렇게 하고, 아버지까지 잡
아갔으니, 그때 보다 지금은 더 잔인해졌을 거라고 생
각했어야 하는데. 일단 돌아오면, 서로 말하고, 그러다
목소리 좀 높아지고, 그래도 서로 이해시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어. 처음부터 그냥
쳐들어 왔어야 해.”
사엘이 말한다. “우리의 계획은 좋았어. 사울진이 알아
챘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거지.”
수아가 말한다. “사울진이 알아챈 걸까?
“그러면?”
“이미 알고 계획했을 수도 있지.”
“어떻게 이미 알아?”
“지금은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해. 사울진과 라단
에 대해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은 없어. 하지만, 확실한
건, 오늘 우리의 계획을 사울진이 너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거야. 라단은 보이지 않았고.”
“그러니까. 라단에게 분명 일이 생긴 거야. 사울진이
모든 걸 알아채고 라단도 어디다..”
여람이 말한다. “나도 수아 말에 동감이야. 사울진이
라단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라단을 어떻게
할리가 없어. 라단도, 아버지에게 등 돌리리는 것은 어
려웠을 수도 있고.”
“아니야. 여람아 그렇지 않아. 라단이 그랬다면 지금까
지 우리랑 어떻게 계획을 세우고 그래. 분명 일이 있는
거야.”
수아가 말한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사울진이 다시 전
쟁을 하러 온다면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해. 그것이 라단
이여도.”
“그럼 너는 이제 저들이 적이 라도 된다는 거야?”
여람이 말한다. “사엘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
들이 이미 우리를 적이라 여기고 공격한 거야.”
수아가 말한다. “이제는 전쟁이야. 저들을 막아내지 못
하면 우리가 죽음을 당하는 거야. 살아남아서, 리만투
어에서 살려면, 이 전쟁을 해야만 하고, 그리고 이기는
수밖에 없어.”
사엘이 말한다. “그래도, 라단을 적으로 생각할 순 없
어. 만나봐야 해. 내가 카야랑 궁에 다녀올게.”
조금 전, 사엘은 궁으로 가겠다는 카야를 위험하다고
말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해도, 어떻게든 궁으로
들어가 라단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쳤어?” 수아와 여람이 동시에 말한다.
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 카야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너네도 마음 좀 가라앉히고 있어”
여람이 일어나 사엘의 팔을 잡으며 말한다. “사엘아.
너야 말로 마음 좀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 봐.”
“이게 지금 냉정한 거야. 왜 너네들은 적이라고 단정하
고, 전쟁부터 하려고 하는데, 우리 그렇게 안 하려고 했
잖아. 지금까지 같이 계획한 라단이 없어. 그럼 라단부
터 찾아서, 알아볼 생각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수아가 나지막하고 냉철한 말한다. “밧세가 다쳤어. 하
지만 죽을 수도 있었어. 하갈님, 정하, 아비갈님이 매
달려 있었어. 그들도 죽을 수도 있었어. 나도 사울진을
죽이겠다고 달려가서 칼을 날렸어. 이미 우린 적이 된
건고, 이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해. 그것이 우리를 지
키고, 이곳을 지키는 일이야.”
수아의 말을 다 들은 사엘은 여람이 잡은 손을 뿌리치
고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수아 말
이 맞다.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다쳤고, 죽을 뻔
했고, 누군가는 죽었다. 서로 적이 된 것이 맞고, 전쟁
이 시작된 것이 맞다. 그렇다면 라단도 구해내야 한다.
구하러 가는 게 당연한데, 라단도 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답답할 뿐이다.
아침이 밝자,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누
군가가 시작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전쟁이 시작되었
고, 밀어붙여지지도 밀어붙이지도 않고, 늘 그 자리에
서, 싸움을 하고, 저녁이 되면, 각자 돌아가 누가 살아
남고 누가 죽었는지, 셈을 한다. 살아서 이기고자 하는
전쟁이기보다는 모두 죽을 때까지 하는 전쟁 같다. 무
엇을 위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미까지 사라진 듯 한
전쟁이다.
“나도 내일은 함께 갈게.” 좀 나아진 밧세가 일어나 앉
으며 말한다.
수아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넌 그냥 여기 가만히 있
어. 더 쉬어야 해.”
“여기 가만히 앉아 너네들 돌아올 때까지 걱정하며 기
다리다가 죽겠어.”
“한번 다시 움직여 보세요.” 아비갈이 말하자 밧세가
힘겹게 팔을 움직이려고 하지만 고통으로 얼굴이 일
그러 진다.
아비갈이 둘러앉은 여람과, 사엘, 수아 그리고 하갈에
게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밖에 찢어진 상처는 잘 아
물고 있어요. 그런데 안에 근육이 상한 거 같습니다. 팔
을 쓰시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럼 팔을 못쓴다는 건가요?” 하갈이 묻자, 아비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지만, 팔을 쓸 수 있다는 것인지, 아
니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큼 손상이 되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이 치유되기도 한다고 하지만, 그때까지
안에 피가 고이지 않게 해야 하고 움직이면 안 돼요. 그
리고 낫는다 해도 얼마큼 움직일 수 있을지는 저도 그
정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비갈님께서 뭐가 죄송해요. 이 정도로 치
료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하갈이 밧세의 팔이 걱정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지
만, 그동안 치료를 해준 아비갈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하갈이 밧세를 보며, “당분간 움직이지 말고, 지켜보자
나도 어디선가 읽은 거 같아. 차갑게 찜질을 하고, 그다
음에 따뜻한 찜질도 하고, 그러면 상처 난 근육이 스스
로 치유된다고 한 거 같아.”
밧세가 말한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팔 정도 다쳐
서 여기 이렇게 누워 있는데, 제가 무슨 걱정이예여요.
매일매일 전쟁으로 나가는 이들이 더 걱정이지요. 사
엘아.”
“응?”
“엄마 좀 모셔줘. 지금까지 내 옆에 계셔서 한숨도 못
주무신 거 같아. 너네도 다 나가고. 쉬어야 내일 또 싸
우지.”
싸운다라는 말에 다들 얼굴이 어두워지며 할말이 없다.
잠시 후, 사엘이 하갈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여람과
아비갈도 일어 난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떠도는 것처럼, 누군가를 매
일 매일 잃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내일 또 싸우러 나
가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