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간의 성차별도 차별금지법이 적용될까?
함께 살던 할머니 고순분 여사는 김지영 씨가 남동생 분유를 먹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분유를 얻어먹다 할머니께 들키기라도 하면 김지영 씨는 입과 코로 가루가 다 튀어나오도록 등짝을 맞았다. 김지영 씨보다 두 살 많은 언니 김은영 씨는 한 번 할머니에게 혼난 이후로 절대 분유를 먹지 않았다.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24p).
밤낮없이 일해서 받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딸들은 기꺼이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했다. 그제야 어머니와 이모는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34-35p).
아버지와 할머니는 전처럼 자매와 할머니가 한 방을 쓰고, 남자애가 따로 방을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어머니는 확고했다(48-49p).
"내가 하지 그럼. 나도 설거지, 청소할 만큼 해. 빨래 마르면 꼬박꼬박 개켜서 정리하고. 지영이도 그래. 우리 집에서 집안일 안 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어."
김은영 씨는 남동생을 노려보았고, 어머니는 남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애잖아."
"뭐가 어려? 난 열 살 때부터 지영이 가방이랑 준비물 챙겨주고, 숙제도 다 봐줬는데. 우리는 쟤만 할 때 걸레질도 하고, 빨래도 널고, 라면이나 달걀 프라이 같은 건 알아서 해 먹었다고”
"막내잖아."
"막내라서가 아니라 아들이라서겠지!"
"할머니 계셨으면 큰누나는 엄청 혼났을 텐데. 어디 여자애가 남자 머리를 때리냐고."(60-61p)
⟪출처⟫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2016
소설 속에서는 가정 내에서 여성 차별이 발생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고 하면 남성 대 여성의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위 소설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손녀들과 다르게 손자를 특별 대우한 것은 같은 여성인 할머니였고, 딸들에게는 당연한 집안일을 아들에게는 시키지 않은 것도 같은 여성인 어머니였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봉제공장에서 돈을 벌어 오빠들과 남동생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던 경험이 있었지요. 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역시 딸들에게 비슷한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새로 이사 간 집에서도 아들에게 방을 주어야 한다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딸들에게 각자의 방을 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요). 이렇게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문화와 분위기에서 남자 위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남자들에게는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을까요? 태어나보니 남자를 귀하게 여기고 우대하는 환경이었다면 남녀의 성평등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남자들만의 잘못은 아닐 수 있습니다. 행동의 잘못과 별개로 인식의 잘못 측면에서 보자면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성차별 사례 중 가족관계에서 성차별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23%). “오빠 밥 차려줘라”, “누나니까 설거지해라”와 같은 일상 속 차별 발언에 시달렸다고요(서울경제 2017. 9. 28). 또한, 어느 시장조사 전문기업에 따르면, 한국사회는 여전히 가정 내에서 남녀의 고정적인 성 역할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67.9%를 기록했습니다(베이비뉴스, 2017. 5. 24). 그렇다면, 이러한 가족 내 성차별을 법으로 금지하거나 법적인 제도로서 가족 내 성평등을 보장할 수는 없을까요? 제가 『82년생 김지영』을 이야기의 주제로 선택하게 된,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방법으로 말이죠.
먼저, 이미 존재하는 제도를 먼저 살펴볼까요? 1995년 12월 30일에 제정되고 1996년 7월 1일에 시행된 「여성발전기본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족관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선언적이고 추상적일 뿐 구체적으로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2014년 5월 28일에 「여성발전기본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부개정 되면서 2015년 7월 1일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그 법에는 “모든 국민은 가족과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양성평등한 대우를 받고 양성평등한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합니다. 비로소 가족 영역에서의 양성평등도 법적인 제도로 논의될 토대를 마련하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실체적인 효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떠한 행위의 금지나 권장이 효력을 가지려면 그 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혜택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위 규정에는 이러한 후속적인 내용이 전혀 없거든요.
이번에는 아직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논의가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안을 들여다봐 볼까요? 가장 최근인 2020년 6월 29일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장혜원의원 대표발의)을 보면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대우도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 금지영역이 교육이나 공공 서비스 이용 등 ‘공적 영역’에서의 차별을 규율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족 내에서 수십 년 동안 관습처럼 이어져온 성차별적 구조나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조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마주해야 할까요? 결국 이 문제는 '법'이 아니라 ‘가치관’과 '문화'의 영역에서 접근해야 하며, 교육과 인식 개선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 내에서의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인간다움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형성하는 사회문화의 토양이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그림책 <여자와 남자는 같아요>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성을 제외하고 똑같이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매우 달라진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그 이유를 여자아이가 받는 대접과 남자아이가 받는 대접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받는 대접은 어른인,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우리 각자의 언행이 아이의 성역할에 대한 가치관을 심어주는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명심하여야겠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그 문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조용히.
그래서 써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