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 쉰여섯에 16학번의 대학생이 되었다.
기억의 환기(喚起)
필요한 사진을 찾으려고 오랜만에 책을 넣어 놓고 쓰는 방에 들어갔다. 거의 창고처럼 사용하고 있는 방이다. 그러다 앨범 옆에서 낯익은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철학과 미학’이라는 강의를 들을 때 교재로 쓰던 책이었다. 선 채로 책을 두어 장 넘기다 보니, 너무 어려워 수강을 후회하며 머리 싸매고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인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흐려지거나 왜곡되고, 편집되기도 한다. 하지만 옛 기록문서나 유물이 발견되면 역사가 수정되고 또렷해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기억도 기록이나 사진과 같이 남아있는 작은 단서들로 불이 밝혀지듯 환기(喚起)되기도 한다.
한 학기를 무난하게 보내려면 수강신청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한 학년을 보내고 실감하게 되었다. 몰아서 강의를 잡았다가 하루에 시험을 세 과목 넘게 봐야 하는 고난의 신세계를 경험하거나, 애매하게 빈 공강 시간이 생기거나, 하나의 강의가 끝나고 다음 강의가 있는 공대 지하까지 먼 거리를 머리카락 휘날리며 뛰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까다롭거나 과제가 많고, 학점에 인색하다고 소문난 교수의 강의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수업 진행표에 발표나 토론, 현장답사가 있는 것도 내겐 기피대상이었다.
시간표 작성 서비스나 학업 관리, 학교 생활정보 등을 제공하는 ‘애브리 타임’이라는 익명의 대학 커뮤니티에는 수강 신청할 때가 되면 지난 학기 강의와 교수님에 대한 아이들 나름대로의 평가가 넘쳐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보가 많을수록 선택은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수강신청도 신선하고 재미있었고 거기에 따르는 긴장감도 나쁘지 않았다. 면접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면 누리지 못했을 경험이었다.
1학년 때의 일이다. 시간표를 짜는 중에 ‘철학과 미학’이라는 교양과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철학과 미학'이라니.. 구체적으로 무엇을 배우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무엇에 이끌리듯 수강하고 싶은 과목을 미리 담아 놓을 수 있는 ‘장바구니’ 기능에 망설이지 않고 냉큼 담았다. 성공적으로 수강신청을 하고 첫 수업에 들어간 날, 나누어준 몇 장의 강의 자료에 나는 절망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난해했다. 나는 과연 이 수업을 잘 해낼 수 있을까?
- 어려운 강의자료 중 일부-
▶ fichte의 절대 자아 : kant 정신을 계승하나 물자체의 불가지론을 극복하고, 현상계와 물자체를 대립시키는 이원론의 탈피를 시도함. 선험적 의식(先驗的意識)을 형이상학 화하여 ‘절대 자아’라 하고, 비아(非我, 자연)는 절대 자아의 소산이다. kant의 물자체를 부정하고 실천이성의 우위(優位)를 더욱 넓혀 표상의 성립까지도 실천성에서 추구하여 실천에 의한 이론적 인식을 마련해 주고 체계적으로 통일함. 인식을 발전면에서 파악하여 kint의 사유를 행위로, 존재 (즉, 자아)를 활동으로 생각하고, 이 사행(事行)이 지식의 절대적 근본 원리라 함. 활동적인 사행으로서의 자아는 인식(범주) 발전의 계기가 되며, 무한히 활동하는 자아에 대해 비아(非我, 자연)는 장애물로 등장 대립에 의한 변증법적 발전으로 절대 자아의 동일성(同一性)이 회복됨......
교수님은 연륜이 있어 보였다. 핸드폰 블루투스 기능을 켜놓으면 자동으로 출결 체크가 되는데, 교수님은 항상 이름으로 출석을 불렀다. ‘경자’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이를 확인받는 것 같은 창피함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자꾸 작아졌다.
처음 하는 경험 속으로
첫 수업에 교재가 정해졌고, 교재 목차에 맞추어 한 사람이 한 단원을 맡아서 ppt로 발표를 하며 수업을 진행했다. 난 ppt 만들기도 자신이 없었고, 아이들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는 수업이라는 것에 미리 겁이 났다. 왜 진작 체크하지 못했을까? 물론 수강신청 정정의 기회는 있었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에 부딪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전에는 없던 용기였다. 나는 교재 두 번째 단원중 ‘그리스 후기 헬레니즘과 로마의 미술’이라는 부분의 발표를 맡게 되었다.
거의 앞부분 발표를 맡은 나는 며칠 동안 준비한 ppt를 USB에 담아서 학교 컴퓨터로 옮겨 발표 준비를 마쳤다. 발표문도 열심히 썼고 질문에 대비한 준비도 철저히 했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학습 발표를 하는 일은 평생 처음이었다. 언제 내게 이런 기회가 있었을까?
교수님께 내 강의 자료를 한 부 건네고 아이들 앞에 섰다. 앉아서 앞만 보고 있는 수업시간과는 사뭇 달랐다. 제법 넓은 강의실이 한눈에 들어왔고, 수십 명 아이들 눈은 일제히 나를 향해있었다. 나이 값은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나이가 있으니까 실수가 있어도 이해하겠지, 라는 생각 사이에서 나는 항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염려와 달리 나는 많이 떨지 않았다. 발표는 길지 않았으나 아이들 몰입도는 최고였다. ‘저 할머니는 어떻게 발표를 할까?’하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교수님 강의 때보다 더 집중하는 듯 보였다. (아, 그 부담스럽던 눈 빛이라니..)
십여분의 짧게 준비된 강의가 끝났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첫 경험에 큰일을 해낸 듯 뿌듯했다. 질문은 없었다. 1학년만 수업을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수업은 초반이어서, 누구도 깊이 이해하고 질문을 할 만큼 진도를 나가지 못한 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난이도 있는 질문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초반에 발표 하기가 다행이다 싶었다. 어쩌면 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고, 배려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 해 겨울방학에 '로마'로 여행을 갔다. 너무도 대견한 나에게, 내가 주는 셀프 보상이었다. 그리고 로마 바티칸 박물관과 곳곳에서 교재 사진에 있던 수많은 조각상들을 보았다. '밀로의 비너스'와 함께 고전기 그리스 황금분할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벨베데레의 아폴론'도 있었고 '라오콘 군상'도 있었다. 익숙하면서 반가웠다. 몇 장 사진도 찍었다. 혼자 따라갔던 패키지여행이라 일행 중에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것은 ‘벨베데레의 아폴론’이라는 미의 규범이 추구되던 고전기 그리스 작품이고, '라오콘 군상'이라는 이것은, 고전적 미의 규범이 흔들리면서 현실적 묘사로 바뀌던 그리스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입니다'라고, 여러 가지로 아는 체를 하고 싶은 '허세'의 강한 유혹을 느꼈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고, 아는 것이 힘이기도 하지만, 역시 요란한 소리는 빈 수레가 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