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사람의 영혼은 허약하다. 단련되지 않은 자의 정신은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휘청거릴 수 있다. 이것이 교훈보다 공감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것이 심리적인 측면이든 관계적인 측면이든 상대방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게으름 또는 무능으로 인해 자기가 성장하지 못했을 때조차 동등한 시선을 원한다. 아니, 오히려 성장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그것을 더욱 갈망한다. 그 사람의 영혼은 단련된 적이 없어 허약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세계관이 넓은 사람을 갈망하면서도 꺼린다. 그 자와의 관계를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지만, 자기의 존재감은 작아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보다 세계관이 넓은 사람을 찾고선 교훈이 아닌 공감, 오만이 아닌 겸손을 요구한다(첨언하자면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넓은 자의 자신감은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오만으로 비쳐진다). 이득을 취하고는 싶지만 위축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고,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인간의 오묘한 심리, 즉 양가감정은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비롯된다. 같은 맥락에서 자기의 존재감이 작아지는 것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보다 세계관이 좁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들의 관계는 위의 모든 논의와 정확히 반대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것일 테지만. 그는 자기의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존재감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우선 교훈이 작동하는 메커니즘부터 살펴보자. 교훈은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전제한다. 누군가에게 교훈을 주는 자는 상대적으로 세계관이 더 넓은 사람일 것을 요한다. 물론 그 사람이 사기꾼이 아닌 솔직한 사람임을 전제했을 때(교훈을 주는 사기꾼 혹은 교훈을 주는 떠버리에 대한 논의는 별론으로 하기로 하자). 당신이 만일 상대방에게 교훈 섞인 말을 한다면 당신은 상대방에게 무려 백마디에 이르는 말로 상대방의 세계관을 넓혀주고도 오히려 원망이나 냉담어린 반응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 공감 섞인 말을 했을 때는 적은 비용을 치르고도 오히려 호감어린 반응으로 돌아오는 것과는 달리.
이제 공감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살펴보자. 공감 역시 사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느끼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동등한 시선이라고 착각되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대방보다 세계관이 넓지 않은 이상 결코 공감이라는 고차원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왜 당신보다 세계관이 넓은 사람이 당신을 먼저 찾지 않는 줄 아는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세계관의 범위 내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공감 역시 마찬가지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세계관이 상대적으로 좁은 사람은 그 범위 내에서 공감이 작동된다. 상대적으로 세계관이 넓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공감이 오히려 자기의 세계관을 축소시키는 격이 된다.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은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세계관이 좁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만일 당신이 지금 논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포함된다면 백마디 교훈보다는 한마디 공감을 하는 것이 좋다. 백마디 교훈은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상대방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도 원망섞인 반응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한마디 공감은 적은 비용을 치르고 상대방에게 적은 도움을 주고도 호감섞인 반응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이 당신에게 더 이득이겠는가? 당신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답답함이 싫다면 존재감의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신보다 세계관이 넓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이다(다만, 당신이 멸시의 시선으로 인해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면 그 자와의 관계에서 겸손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러나 존재감의 위협이 너무도 싫다면 당신은 답답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신보다 세계관이 좁은 사람을 만나 교훈이 아닌 ‘공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