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매일 책을 읽고 도서 기록을 남겼다. 아이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도서 기록을 통해 부모와 교사가 함께 나누었다. 이 기록은 독후감 같은 형식은 아니고 짤막하게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이야기하며 부모가 아이에게 남겨주는 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은 제법 책 읽는 습관이 들여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난 후에 할 거라곤 깊이 있게 그 책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어떠한 과제도 주어지지 않았다. 호주 주정부 교육부에서 내려오는 도서목록들도 바로 부모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에 아이들이 보는 책들이 대부분 거의 비슷했다. *(호주 퀸즐랜드주 교육부에서 선정한 필독도서 리스트는 아래에 붙여놓았다.) 생각보다 필독도서 목록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도서들만 다 읽으면 차례로 읽을 것들이 더 생겼다. 시리즈들 중 1권이 필독도서 목록에 있었는데, 아이들이 읽고 나면 꼭 2권, 3권을 이어서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독서를 열심히 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행사인 북위크 때문이었다. 학교마다 조금씩 그 날짜는 다르지만 대략 8월 중순쯤부터 북위크가 시작된다. 이 행사는 호주 내 초등고등학교뿐 만 아니라 유치원, 어린이집까지 하는 큰 행사 중 하나이다. 북위크 주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또한 주 마지막 날인 금요일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주인공과 같은 옷을 입고 한껏 꾸민 후 학교에 가는 행사가 있다. 바로 '북위크 퍼레이드' 행사 때문이다.
보통 북위크 때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공주드레스를 입고 오는 편이고, 남자아이들은 히어로 코스튬을 하고 온다. 하지만 사서 입는 코스튬보다 사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그 의상이나 소품을 만드는 시간을 갖는 것을 제법 성의 있게 북위크를 맞이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매년 그래서 나는 아이와 무슨 옷을 어떻게 만들어 입을까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학년에는 학급에서 전체로 테마를 정해서 같이 코스튬을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딸아이의 반에서 선정된 책은 'Aliens love underpants-외계인은 팬티를 좋아해'였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제법 인기가 있는 책으로 알고 있지만, 호주에서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부모들에게 공지를 보내셨다.
하얀색 팬티를 챙겨 보내주세요,
부모들 단톡방에서는 그 즉시 어디에 하얀색 팬티를 팔고 있는지, 그 가격은 어떻게 되는지 공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북위크 주간에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팬티를 꾸몄다. 외계인 모자도 만들며 퍼레이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리고 드디어 퍼레이드 당일, 아이들은 교복을 벗고 자유롭게 퍼레이드 의상을 입고 등교를 하였다. 페이스 페인팅에 컬러 헤어스프레이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였다. 딸아이는 핑크외계인인 하고 싶다고 해서 집에 있는 핑크색 옷을 꺼내어 입고 머리에 핑크색 스프레이를 뿌린 후 얼굴에 외계인 하나를 그렸다.
이 날을 부모들도 참석하여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오전활동을 이어갔다. 부모들도 원하면 외계인 복장을 하고 와도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는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퍼레이드에 참여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일하는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코스튬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딸아이는 딸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한 주를 책 속 캐릭터로 지내며 책도 서로 읽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책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책을 읽고 독후활동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독서 감상문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퍼레이드에서도 제일 잘 꾸민 사람을 뽑는 일도 없었다. 같은 책을 읽었어도 저마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꾸며진 코스튬들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것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날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모두의 축제였다.
*호주 퀸즐랜드주 학년 별 필독도서 리스트
https://readingchallenge.education.qld.gov.au/resources/book-li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