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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 남친 사귀는게 나의 선택이었다고?

by 창가의 토토 Feb 13. 2025

딸의 남친, 현지인

나는 토종 한국사람, 남편도 토종 한국사람

딸은 ‘토종’한국 사람이라고 말 못하겠다.

우리 딸은 외국에서 태어났고, 외국에서 자랐다.

우리가 집에서는 한국말만 써야한다고 가르쳤기때문에 한국말을 잘하고, 집에서는 대부분 한국음식을 먹기때문에 딸아이도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

그래서 나는 우리 딸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딸아이의 ‘한국인’의 모습만 본 것일뿐 실상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정체성은 한국인이 아니다.


우리는 두번의 이민을 했으므로, 아이는 어쩌면 한국인 33%, 제1이민국 33%, 제2이민국33% 정도의 비율로 문화와 애국심을 가질지 모르겠다.

만약 이렇게 3국이 월드컵을 한다면 어느나라를 응원하겠냐는 질문에 그때 그때 달라요~ 라고 말할 정도이다.

친구들도 한국인보다 현지인이 더 많고, 딸 둘이 대화할때는 영어나 스페인어를 쓰기 때문에 어쩌면 외모만 한국인이지 현지인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넌지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한국인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결국 현지인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아이는 한국인 남자애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물론 한국인 남자애들이 많지 않기도했지만, 또 다른 이유로는 한국인 남자친구를 사귀면 좁은 이민 사회에서 소문이 금방 퍼지고, 또 사귀다 헤어질 경우에도 그 소문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이유로 더욱 마이너스 요인이 된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여중, 여고를 나와서 불행히도 남사친을 사귈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 남자 사람을 만나고, 그 중에 호감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마음을 준 것이 결혼까지 어어진터라 아이들에게 남사친을 많이 사귀라고 말을 많이 했었는데, 딸아이가 남사친을 사귀라니까 남친을 만들어버린거다.

근데 현지인 남자친구를 데려오니, 이것저것 마음에 안드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은 제일 결정적인 요소가 언어의 장벽이다.

이민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이제 어느 언어도 100프로가 안된다.

아무리 한국말로 소통을 한다해도 중간중간 에스파뇰 단어가 섞여나온다.

우리가  에스파뇰에 능통해서 그런게 아니라, 어떠한 단어들은 에스파뇰이 더 경제적이다. 어떤 단어들은 에스파뇰로 말을 해야 훨씬 이해가 쉽고 오히려 한국말로 바꾸려고 하면 그 의미가 덜 표현되는 것들이

있다.

이제 한국어도 딸리고, 현지어는 당연히 더 못하는 상황에 현지인 남친을 데려오니 도무지 소통이 너무 불편하다.

소소한 농담이라도 할라치면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대화를 진지하게 이어가게 되는데 그런 무거운 분위기가 어색하고 답답하다.

원래 우리집의 대화는 거의 내 주도로 이어가다보니 내가 입을 다물면 대부분 침묵의 시간인데, 딸의 남자친구랑 할 얘기는 너무나 한정적이다.

“맛있니? ”

“맛있어요. ”

“그래 맛있게 먹어서 좋네~ ”

이게 다다.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딸과의 문화차이로  말다툼으로 이어질 때도 있는데, 말다툼 중에 내가 왜 한국인 남친말고 현지인을 사귀었냐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엄마가 왜 이민을 나왔냐는 말이었다.

엄마가 나를 이 땅에 데려왔으면,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고, 현지인 남친 사귀는 것까지 다 이해하고 보듬어야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 노출 시킨 것은 이민을 나온 엄빠의 결정에 의한 것이고, 이런 소릴 할꺼면 왜 이민을 나왔냐고 오히려 따지듯이 물었다.

서로 감정이 격앙된 상태여서 말을 이쁘게 못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강했지만,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고등학생때까지는 yes girl이었던 딸이었는데, 대학생이 됨과 동시에 엄청나게 자기 주장을 어필하고 강하게 맞서는 큰 딸때문에 서운하고, 마음이 아파서 한동안 가슴앓이를 호되게 앓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나도 나의 분신 또는 소유물 정도로 생각했던, 애착의 정도가 너무 강했던 딸과의 거리두기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조금씩 한 걸음씩 ‘거리두기’를 해야겠지.

그래야 딸이 독립을 하든 시집을 가든 그 때가 되면 조금 쿨하게 박수치며 보내 줄 수 있겠지.


나는 이렇게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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