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과정
여태껏 우리는 연단에 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전달 매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럼 지금부터 본론에 들어가 강의 제안이 들어온 후부터 마칠 때까지 연자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하나 순서대로 접근해 보자.
(이 부분에 관한 한 정해진 룰이란 게 없기에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필자의 주장이란 사실을 감안하고 각자의 상황에 맞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준비 과정의 첫걸음
강의 제안이 들어와 수락하고 난 다음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1) 대상 파악
강의를 하기 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청중에 대한 파악이다.
이유인즉 주최 측에서 강의 카테고리나 제목을 정해서 요청해 온 경우라 할지라도 대상에 따라 그 내용이나 수준을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의사들을 상대로 한 의학 강의는 초청기관명과 프로그램만 보면 이미 대상이 특정되고 청중의 수준이 정해지기 때문에 아주 수월하다. 하지만 인문학 강의는 다르다. 초청기관과 프로그램을 봐도 청중의 성분과 수준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10년 전, 부산의 한 대학으로부터 신임교수연수회 때 인문학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이에 나는 강의 수락 후 담당자에게 다음에 관한 정보를 보내달라 했다.
* 수강 인원
* 과별 분포
* 남녀 비율
* 연령 분포
'신임교수연수회'라면 이미 대상이 특정되고 목적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임교수연수회‘라는 정보 하나로는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의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이 중, 연령 분포를 물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학병원 신임 교수의 경우 의대 졸업 후 인턴 레지던트 마치고 전문의 따고 군에 갔다 와서 자 병원이나 타 병원에서 전임의(fellow) 1~2년 하고 오면 대개 나이가 서른대여섯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일반대학의 경우 시간 강사들을 많이 쓰다 보니 신임 교수라 할지라도 나이 편차가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대상 파악이 끝나면 그들의 수준에 맞게 강의 내용을 준비하고 강의 중 들어갈 유머나 농담의 수위를 조절한다.
2) 장소 파악
강의 대상과 함께 알아봐야 할 것은 강의 장소에 대한 정보로서 필자는 다음에 관한 정보를 요구한다.
* 강연장의 넓이
* 스크린의 크기
* 연자가 조작할 컴퓨터가 연단 내 매립형 인지 아니면 연단 위에 놓는 노트북인지
* 노트북이라면 모니터 크기는 몇 인치나 되는지
그런 연후, 강의가 주최 기관 내에서 이루어질 때는 여러 각도에서 찍은 강의실 사진을 요구하고, 호텔이나 시민회관 등 외부 장소에서 할 경우에는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그 장소에서 치러진 각종 행사 사진들을 수집한다.
3) 시물레이션
이런 정보가 왜 필요할까?
목적은 하나, 이를 바탕으로 시물레이션을 하기 위함이다.
시물레이션은 왜 하나?
미지의 대상과 장소에 미리 친숙해지기 위함이다.
아무리 베테랑 연자라 할지라도 연단에 오르기 직전 직후에는 떨리는 법이다.
한 번도 안 가본 장소에 가서 예상치 못한 대상과 맞닥뜨리면 당황할 수도 있고 주눅이 들 수도 있다.
이런 걸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서는 위의 정보를 바탕으로 미리 머릿속으로 시물레이션을 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강의록 준비가 끝나면 매일 자기 전에 한 번은 눈을 감고 강의 장면을 그려본다.
그 장소를 떠올리고, 연단에서 열변을 토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고, 상상 속의 청중에게 질문도 던지고 농담도 하면서 다 함께 웃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연단에 서면 비록 처음이라 할지라도 청중에게 친밀한 마음이 들고 뭔가 자신감이 생겨 강의가 수월하게 잘 풀려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