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Oct 12. 2024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게 한 여인

기지와 재치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다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다'라는 말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특히 처음 만난 남녀가 하룻밤을 찐하게 보내고 나면 마치 십년지기라도 된 것처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로 통해왔지만, 원래 이 말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때는 바야흐로 진시황이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시작했을 무렵, 한 젊은 남녀가 신혼생활 한 달여 만에 남편이 장성 쌓는 부역에 징용당해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생이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남편을 따나 보낸 부인은 산골 외딴집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남편 나이 또래의 소금 장수가 싸리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다음과 같이 잠자리를 청했다.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시지요."       


여인은 남편이 곧 돌아올 텐데 남편 없는 사이에 외간 남자를 들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소금 장수는 이미 그녀가 혼자 사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겁박하며 노골적인 수작을 부렸다. 이에 여인은 저항해 보았자 소용없음을 느끼고 되도록 잘 대접해 주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하룻밤을 넘기기 위해 그를 방으로 들이고 저녁상을 보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친 소금 장수는 상을 물린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한데, 어떤 사연이 있나요?”     

여인은 더 이상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과 헤어지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밤이 깊어져 가자, 사내는 더욱 음심(淫心)이 동하여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어왔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우린 아직 젊소. 내가 당신을 평생 책임질 터이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그러면서 사내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고 깊은 야밤에 인적도 없는 이 외딴집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여인 혼자 저항한들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에 여인은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면 당신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노라고 말했다.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비록 잠시라곤 해도 남편과는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습니다.

그런 남편이 부역장에 끌려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 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전해주시고, 그 증표로 남편의 글 한 장만 받아와 주십시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壽衣)라도 한 벌 마련해 주는 기분으로 옷 한 벌 지어 입히고 가면 그래도 내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질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약속을 먼저 해주신다면 오늘밤 제 몸을 허락하겠고, 내일 그 약속을 지키시면 기꺼이 당신을 따라나서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지라 사내는 그렇게 하겠다 하고선 밤새 욕정을 채운 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누군가 몸을 흔드는 기척에 눈을 떠보니 곱게 단장한 젊고 어여쁜 여인이 아침 햇살에 얼굴을 반짝이며 다소곳이 앉아있는데 마치 양귀비를 보는 것 같았다.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그는 간밤의 피로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길 떠날 채비를 했고, 여인은 장롱 속에서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그의 괴나리봇짐에 챙겨 넣었다.           


사내는 한시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해야겠다는 마음에 후다닥 길을 떠나 꼬박 하루를 걸어 부역장에 도착해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며 말했다.

"나리, 그를 이 옷으로 갈아입히고 글을 한 장 받아 가야 합니다."     


그러자 관리는 옷을 갈아입히려면 부역인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부역인이 공사장 밖으로 나오려면 그 시간 동안 누군가가 대신 부역장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사내는 그러기로 하고 밖으로 나온 여인의 남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며

 ”빨리 이 옷으로 갈아입고 편지를 한 장 써 놓으시오.” 하고는 별생각 없이 부역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편지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한 통 떨어졌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부역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몸을 섞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입는 즉시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저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부역장 안으로 도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에서 빼내 주기 위해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한다.      

그 일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순도순 살 것인가? 아니면 평생 못 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갈 것인가?     


생각해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어떤 바보가 도로 들어가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입은 후,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여인의 기지(機智)야말로 참으로 놀랍지 아니한가!

욕정에 눈이 먼 남자로 하여금 남편 대신 만리장성을 쌓게 하고, 그와 동시에 남편의 입에도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버린 여인. 


세상 살다 보면 이꼴 저꼴 별꼴을 다 겪으며 산다.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도 없겠지만, 혹여 위의 사내처럼 순간적인 정욕이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만리장성을 쌓아주어야 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멋진 이야기다.


이전 07화 교황의 아버지를 멋쩍게 만든 자랑스런 내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