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는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블록쌓기이다. 필자는 이를 「내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두 개 이상의 우연이 순차적으로 포개지듯 일어나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지점으로 나를 몰아가는 것」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이런 관념적 개념은 백 마디 논리적 설명보다 하나의 실례(實例)를 통해 접하는 것이 훨씬 더 피부에 와닿을 것이기에 필자의 경험을 곁들여 설명하고자 한다.
운명의 갈림길
11월의 차가운 공기가 병원 복도를 감쌀 무렵, 나의 동료 인턴들은 하나둘 레지던트로 갈 병원이 확정되어 이틀이 멀다 하고 축하주 마시러 나가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갈 곳이 없었다. 이제 거부당하는 수모도 신물이 날 지경이라 더 이상 구걸하러 다니기도 싫어, 근무 없는 날도 "케세라세라" 하며 숙소 침대에 누워 굼벵이처럼 뒹굴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할 일도 없고 심심하기도 해서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 들고 이리저리 전화질이나 하다가 문득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 후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나의 후배 ‘헌기'와 절친한 친구라 예과 때부터 서로 형, 동생 하며 가까이 지내던 사이로 당시 부대병원 영상의학과 레지던트 1 년차로 있었다.
"문 선생, 잘 있냐?"
"아이고 형님, 그동안 우째 지내셨능교?"
우리는 오랜만에 통화하며 별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다가 아무 생각 없이 인사 삼아 물었다.
"너희 과 티오는 다 채웠냐?"
"아니요, 킴스 두 개에 난킴스 티오가 하나 나왔는데, 난킴스 지원자가 아직 없어요. 이런 일은 우리 의국 생긴 이래로 처음이라요."
여기서 '킴스'란 전공의 수련 후 군의관으로 가야할 사람을, '난킴스'란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나 군복무가 면제된 사람을 지칭한다.
순간, 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침대에서 번쩍 일어나 앉았다.
그때까지 영상의학과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과였지만, 갈 곳 없는 나로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야! 그럼 내가 가도 되겠나?"
"잘됐네요. 빨리 오소. 내일이 마감이요!"
다음 날, 나는 아직 근무 시간 중이라 나머지 업무는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최대한 서둘러 갔지만 약속 시각보다 10분 정도 늦게 부산대병원 방사선과에 도착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를 기다리던 레지던트들은 점심 식사하러 나가고 의국에는 아르바이트 여고생 혼자 남아있었다. 그녀는 일찍 퇴근하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의국 좀 지켜달라고 부탁하곤 홀라당 퇴근했다. 텅 빈 의국에 혼자 남아 소파에 앉아 있는데, 그녀가 나간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사람이 문을 빼꼼히 열고는 물었다.
"여기 난킴스 지원자 있습니까?"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가 모르는 얼굴인 걸로 봐서 그는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선배임이 틀림없었다.
만약 장애인인 내가 군복무까지 마친 사지 멀쩡한 그와 맞붙는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퉁명스레 한마디 내뱉았다.
"예, 있어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휴~"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리하여, 한 사람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방사선과로, 또 한 사람은 방사선과를 찾아갔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마취과로…. 간발의 차이로 두 사람의 운명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우연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정교한 설계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한번 해보자.
1) 만약 그날 전화번호 수첩에서 문 선생의 이름을 보지 못했더라면?
2) 내가 의국에 전화했을 때, 문 선생이 화장실에라도 가고 없었더라면?
3) 만약 그때, 난킴스 지원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4) 그날 의국을 지키던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내게 부탁하고 일찍 퇴근하지 않았더라면?
5) 만약 그 선배가 나보다 5분이라도 일찍 왔더라면?
이 다섯 가지 조건은 각각 수평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블록쌓기'처럼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이기에 이 중 하나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이들 중 내가 뺄 수 있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이 블록 하나하나는 그저 우연히 포개진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설계도에 의한 것이었다.
나에게 운명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지을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블록쌓기'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 표제사진 출처: Gens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