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일생에 걸쳐 경험이라는 벽돌과 가치관이라는 시멘트로 견고한 자신만의 성(城)을 쌓으며 관념이라는 망루를 통해 밖을 내다보고 산다. 젊은 시절 이 성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유용한 벽이 되고 망루는 바깥세상을 조망하고 판단하고 예측하는 창구가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들면, 지금껏 나를 보호하던 그 성은 자칫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고, 망루는 세상을 두루 보지 못하고 한 곳만 바라보는 시야협착증 환자로 만들기도 한다.
‘6 Up, 6 Down’의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덕목인 ‘Break Down - 틀을 깨라’는 말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해체로부터 시작되는 노년의 재건축과 같다. 이는 나를 가두고 있던 견고한 성을 허물고 나와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며, 마침내 생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까지도 초월하고자 하는 능동적 해체이자 자유를 향한 선언인 것이다.
관념의 틀을 깨라
다리를 다쳐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내게 허락된 바깥세상으로의 통로는 쇠창살과 자물쇠로 채워진 작은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강도로 낮과 밤을 구별하였고, 나뭇잎의 흔들림으로 바람이 부는지 알 수 있었고, 창문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보고 비가 오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얼마나 답답하던지! 다시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 끔찍한 기억이 하필 왜 이 시점에 되살아날까?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온 관념이란 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이때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그 창틀의 넓이와 모양으로 제한된다. 우리는 그 작은 틀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보고 바깥세상의 전부를 보는 양 착각하고 산다.
‘Break Down’의 본질은 바로 이 고정된 틀을 개조하는 작업이다.
완전히 깨지는 못하더라도, 보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모양을 바꾸어 보고 넓이도 넓혀보는 것이다.
각지고 뾰족한 사각형의 틀을 부드럽게 굴곡진 하트 모양으로만 바꾸어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하게 보이겠는가.
창틀을 위아래로 잡아 늘이면 하늘의 높음과 땅의 넓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양옆으로 늘리면 대지에 존재하는 다양한 존재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해질까?
내가 걸어온 길은 세상의 수많은 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
내가 보고 경험한 세상은 전 인류가 보고 경험한 것에 비하면 일개 요양병원 안에서 겪었던 그 제한적인 생활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내가 아는 지식과 내가 가진 신념이 100% 다 맞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관념의 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장벽을 허물어라
현재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벽이 존재한다. 이념 간, 계층 간, 세대 간, 인종 간 등등.
명절날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인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에서, 정치 얘기만 나왔다 하면 부모와 자식 간에 얼굴 붉히고 언성을 높이게 될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쓰나미같이 퍼져 나간 한류의 영향으로 인천공항은 이제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하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한국 생활을 체험하고자 장기체류를 택하고, 그중 일부는 아예 한국에 정착하고, 또 그중 일부는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이리하여 요즈음은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며, 해운대나 송정 바닷가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일 정도가 되었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할 때 그 다양성만큼이나 많은 벽이 생기고 이 장벽들을 허물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결코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 역시 병아리가 달걀의 껍데기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듯 관념의 틀을 깨고 나올 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갈 때 가능한 것이다.
이제
내가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상대를 보다 더 이해해 보자.
내가 먼저 상대를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 보자.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서로 손잡고 함께 걸어가 보자.
그리하여 오래된 낡은 건물에 있는 불필요한 벽들을 허물고 산뜻하게 리모델링해서 깨끗한 새집으로 만들어 가보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물리쳐라
‘Break Down’의 최종 단계는 인간이 가진 가장 견고하고도 근원적인 틀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두 단어로 축약하자면 ‘상실’과 ‘미지’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은 참기 힘든 상실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사후 세계에 대한 불안은 인간의 뇌리에 각인된 죄와 벌에 대한 인식과 만나 죽음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족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1.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요, 이는 곧 삶의 완성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한 편의 드라마도 엔딩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고 평가받듯이, 인생 또한 엔딩이 있어야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인생이 만약 골인 지점도 없이 끝없이 달리기만 하는 마라톤이나, 정박지도 모른 채 고해의 바다를 끝없이 저어가야 하는 항해라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끝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쉼과 안식이 허락된다.
2. 상실은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고 남기는 것이다
상실의 고통은 내가 가진 것들을 빼앗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잃는 '박탈'이 아니라, 내가 가졌던 온기와 사랑을 세상에 골고루 '분배'하고 떠나는 성스러운 이양이다. 내가 사랑했던 이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내가 일구어 놓은 삶의 자취 속에 나의 일부가 영원히 깃들게 된다고 믿는다면 이별은 더 이상 일방적인 상실이 아니다. 떠남으로써 비로소 남겨진 이들에게 소중한 자리를 내어주는 숭고한 배려인 셈이다.
3. 죽음은 순환하는 자연으로의 귀환이다
세상 만물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간다. 조물주가 직접 흙으로 지으신 인간 역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며,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듯 만물은 순환의 법칙을 통해 그 영속성을 이어간다. 인간의 죽음 역시 생명의 에너지가 형태를 바꾸어 우주의 질서 속으로 다시 스며들어 가는 과정일 뿐이다.
4. 죽음은 영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모든 생명체는 위의 과정으로 끝나지만, 인간에게는 그들과는 다른 한 가지가 더 남아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여느 생명체와 다름없지만, 그 육신에 숨결을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된 영혼은 떠나온 본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세상 구경 다 마친 후 고통의 육신을 벗고 본향으로 돌아갈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 나를 보내신 그분의 품에 안길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