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계절에 따라 사람의 고개 각도는 미묘하게 변한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고개를 들 일보다 숙일 일이 훨씬 많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물론이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마주하는 선배, 상사, 그리고 조직의 실권을 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기본자세이자 일종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러다 중장년기에 접어들어 사회적 성취를 쌓아가기 시작하면 고개의 각도는 달라진다.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고 누군가의 윗사람이 되면서, 사람의 고개는 서서히 위를 향해 올라간다. 자신이 일궈낸 성과와 경륜은 자부심이 되어 목에 힘을 불어넣는다. 성취가 높을수록, 지위가 확고할수록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는 것을 당연한 보상이자 갖추어야 할 권위쯤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은퇴 후다.
직장이라는 사회적 연결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연령상으로도 한 집단의 최고 어른이 되면 한껏 올라간 고개는 좀처럼 내려올 줄 모른다. 더 이상 눈치를 볼 상사도, 비위를 맞출 실권자도 없다는 해방감은 자칫 아집과 독선으로 변질되기 쉽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후반전에서 대접받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올라간 고개 다시 내리고 뻣뻣하게 굳었던 목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에나, 아무한테나 고개를 숙이라는 말이 아니다.
불의나 거짓, 부당한 강요 앞에서는 당당히 고개를 들고 맞서야 한다. 오만한 자 앞에서는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어떤 의미로 고개를 숙여야 할까?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기 쉽다.
지난날의 성공이나 업적에 매몰되다 보면 스스로를 높은 보좌에 올려놓고 타인을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쉽다. 이럴 때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곧 타인에 대한 존중의 표시이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다.
상대방의 나이나 빈부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할 때, 그들 역시 우리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 줄 것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일 때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무언가 하나라도 배우는 게 있을 것이다.
감사할 줄 아는 지혜
나는 과거 35년간 대학병원 교수라는 직업 때문에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병원과 의료 관련 부탁을 받고 해결사 노릇을 해왔다. 그 후, 대학을 떠난 지 어언 8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그런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내가 현직 교수로서의 파워를 가지고 있을 때야 어차피 서로 부탁을 주고받는 사이니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대학을 떠난 후에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내가 근무하고 있지도 않는 병원에다 대고 이런저런 부탁을 하려면 결국 제자나 후배들에게 머리 숙여가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일의 성사 여부를 떠나 신경 써준 데 대한 보답으로 카톡 선물이라도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나 가족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 달라며 내게 매달렸던 사람들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열 명 중 한 명 정도는 선물을 들고 찾아와 고개 숙이며 진정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예닐곱 명은 전화로 고맙단 말 한마디 하고 때우고, 나머지 두어 명은 아예 전화조차 없다. 이들 중 제일 얄미운 존재는 조만간 식사 한번 대접하겠다고 말하고선 가물치 콧구멍인 사람들이다. 지키지 못할, 아니 지킬 생각조차 없는 말이라면 차라리 안 하는 편이 낫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문제는 그 후다. 의료문제에 관한 한, 한번 길을 트고 나면 단 한 번의 부탁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드시 또 부탁할 일이 생긴다. 그랬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만으로도 재미있지 않은가?
감사의 표현은 인간관계의 윤활유이자 타인의 선의를 지속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다. 진심 어린 감사의 표현은 나를 위해 상대방이 들인 시간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보람을 느끼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겠냐는 식이다. 하지만 표현되지 않은 감사는 전달되지 않은 메시지와 다를 바 없다. 또한 이런 태도는 남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뻔뻔스러운 태도로 낙인찍히고, 이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도움을 받을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는 것과 같다.
사과할 줄 아는 용기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머리 숙여 사과하는 행동은 비굴함의 증거가 아니다. 이는 두꺼운 자존심의 외투를 벗어 던질 줄 아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자 현명한 처신이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은 단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행위를 넘어 상대방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리는 공감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심 어린 사과는 팽팽하게 당겨진 갈등의 끈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붙잡아주는 '안전핀'임과 동시에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침묵을 택할 경우, 상대방의 가슴속에는 해소되지 못한 앙금이 고이게 마련이다. 사과받지 못한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고,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진다.
자기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는 사람.
그 모습은 자신의 뻔뻔함과 치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우스꽝스러운 흉상과 다름없다. 진정으로 높은 곳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고개 숙여 사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Bow Down의 미학
노년은 증명의 시간이 아니라 수용의 시간이며, 자신을 비우고 타인을 채우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Bow Down'은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나’라는 중심축에서 ‘우리’와 ‘생명’ 전체로 확장시키는 사고의 표현이다.
허리를 굽힐 줄 아는 사람만이 똑바로 오래 서 있을 수 있고,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사람만이 고개를 바로 들고 바로 볼 수 있고,
낮아질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다.
인간의 패망은 내려올 줄 모르는 오만의 자리에서 시작되기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추락할 위험이 없다. 이미 낮은 곳에 둔 몸과 마음은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평온을 얻는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만물을 적시고 생명을 살린다.
노년의 삶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낮은 곳에 둘 때, 나라는 연못 속에 물고기도 살고, 풀도 자라고, 꽃도 핀다.
고개를 숙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과, 여태껏 나를 세우고 손잡아준 수많은 존재의 노고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근엄함 대신 인자함이 묻어나는 얼굴.
나이를 무기 삼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며 필요할 때 기꺼이 고개 숙일 줄 아는 노인.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노인.
이런 인간상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진정한 노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