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아버지~정치

by 김영


아버지


홀연 바람이 일어 나뭇잎을 흔들 때면 설마 당신이 아닌가 생각해요 내 생각이 맞은 듯 당신은 온몸을 싸고돌면서 외로움을 들춰내려 해요 이제 가슴을 풀어 헤지고 바람이 전하는 말을 똑똑히 들을 겁니다 당신의 되뇌는 말을요 아무려면 바람이 아무 의미 없이 불겠어요 이제는 아프지 않고 편안하시죠 이제는 새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도 찌겁찌겁한 눈곱도 달그락대는 틀니 소리도 숨 쉴 때마다 들리는 가르랑거리는 소리도 두툼한 보청기에서 나오는 피리소리도 구겨져 버린 주름도 꾸부정한 모습도 허물어져버린 삶도 부끄럽지 않으시죠 이제는 분별을 잃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도 책망하는 가족도 없고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가족 때문에 조바심치며 초조할 필요가 없어 한결 편안하시죠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죠 저도 당신의 뒤를 이을 거예요 이제는 같은 극으로 밀쳐내기만 하던 척력은 사라지고 자기혐오의 분노도 만지작거리던 소멸의 희망도 적절히 조절하고 상실에 체념하는 법도 배웠어요 이제는 과거를 되돌릴 기대와 미래에 대한 우려를 내던지고 우리의 노래를 불러요 혹시 모르잖아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수없는 우연 속에 햇빛이 사각사각되는 산책길에서 만날지 그곳은 아마도 서로가 발음하기 곤란한 낱말들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우리도 인간에게서 채집한 말로 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를 해요


악몽


내게도 미처 깨닫지 못한'특별함'이 있다. '말더듬'이다. 내 아비도 말더듬이다. 아마도 나의 뇌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무렵 하필이면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한 이유일께다. 마흔이 넘어 귀하게 얻은 사내놈이니, 나에게 많은 것을 더듬거리며 귓속말로 속삭였겠지. 사랑한다고. 그 소곤거림은 말더듬이의 유전자를 머릿속에 고스란히 박아놓았다. 그에게 외부 세계는 항상 상처받고 소통하기 힘든 세계였을 것이다. 그런던 차에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다 쏟아냈겠지.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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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를 알 수 없는 곳에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어. 아득한 동굴처럼 입을 벌린 그곳에서 뭔가 미끄러운 것이 잡혔어. 잡으려고 하면 미끌미끌하여 이리저리 빠져나가버렸어. 간신히 물컹한 그것을 잡아당겼지.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너의 모습을 보았어. 방금 허물을 벗은 연분홍색 뱀 같기도 하고, 미끄덩한 붕장어 같기도 했어. 자세히 보니 좁쌀 같은 것이 도톨도톨 돋아있는 검붉은 놈이었어. 난 그 흉하고 끔찍한 그놈을 잘라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급히 손으로 베갯 속을 더듬거렸어. 숨겨놓았던 식칼이 잡혔어. 악몽을 꾸지 않으려고 베갯 속에 숨겨두었던 식칼이다. 이때다 싶어 한 손으로 발버둥 치는 그놈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힘껏 내리쳤어. 식칼은 점액질이 흐르는 그놈의 미끄덩한 살점을 가르고 들어갔어. 통쾌했어. 그런데 미끄덩한 그놈은 잘리지가 않았어. 힘을 줄수록 그놈은 버둥거렸고, 그 힘이 손에서도 느껴졌어. 식칼은 그놈 몸에 반쯤 걸려있고, 열개(裂開)된 그놈 몸에서 끈적한 점액질이 나와 식칼을 감쌌어. 그리곤 더 날름거리는 검붉은 놈으로 변했어. 더 센 놈이 된 거지. 나는 어이가 없어 소리치고 싶었어. 근데 말이 안 나와. 나의 혀는 날름 대기만 하고 꼬인 혀가 움직이지 않았어. 그리곤 깨었어. 허전한 아침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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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한 데로 나는 말더듬이다. 말더듬이 증세는 첫 발음이 떨어지지 않거나 특정 단어의 첫 발음이 안 되는 증세이다. 학창 시절 국어, 영어시간에 글을 읽는 시간은 공포였다. 체벌을 받거나 놀림거리였다. 그들이 세운 기준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아니, 존중할 수밖에 없다. 주도권은 이미 그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나의 목구멍과 혀와 입의 현란한 협업이 깨져 "그 그 그녀는..." 할 때면 잠결에 있는 아이들까지 깨워서 하나의 놀림거리를 제공한다. 말더듬이라고. 물론 그들의 수군거림과 조롱의 눈길을 피해 숨고 싶다. 그렇지만 벌건 세상에는 나를 감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어째서 나의 첫 발음들은 어두운 목구멍에서 나오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아니 주저한다기보다는 끈끈이에 발을 잘못 디딘 파리가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요란한 날갯짓도 소용없다. 허우적거리다 날개도, 몸도 끈끈이와 쩍 하고 달라붙어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야만 빛으로 가득한 바깥 세계를 만날 수 있는데 말이다. 꿈속에서도 누군가 나타나면 멀찍이 피해 서있곤 한다. 말을 시킬까 두려워서다. 운 좋은 날도 있긴 했다. 나의 안과 밖이 시원하게 관통하는 날ㅡ비말 품은 바람이 나의 내면 구석구석을 헤집고 무거운 끈적임을 날려버린 날 ㅡ이면 마치 남들은 하지 못하는 근사한 일을 해낸 것처럼 흥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선생님은 시큰둥하다. 그들한테는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벅차오름은 그들의 회색빛 벽에 막혀버렸다. 그들에게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은 너희처럼 똑같이 말할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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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커덩'하고 아파트의 방화문이 닫혔다. 손잡이는 엿가락처럼 휘어 '쩍'하고 문에 들러붙었다. 숨이 가빠진다. 폐소 공포증이 목을 조여 온다. 계단의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정사각형의 동굴 안에서 난데없이 뿌연 것들이 밀려온다. 모래 폭풍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하다. 차가운 습기가 없는 걸 보니 모래 폭풍 같다. 폭풍 속에서 모레의 촉감이 얼굴에 느껴지고, 모레가 목에 걸린다. '모레 속을 헤쳐나가야 돼! 어디로 달려가야 하나? 방향을 잘 잡아야 빠져나올 수 있다.' 난간에 의지한 체 손으로 훑어가며 걸어갔다. 끝이 없다. 몸에 부딪히는 모래의 농도가 짙어진다. 중심으로 더 다가가는 것 같다. '어떻게 할까? 모래폭풍이 스스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자!' 모레가 쌓인다. 발목에서 가슴까지 차오른다. 발버둥 친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휘두른다. 휘두를수록 나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턱밑까지 모레가 차오른다. 얼굴에 모레의 촉감이 느껴진다. '괜찮아. 이렇게 빠지다 보면 심연에 도달할 수 있어. 나의 몸을 덮을수록 빨리 도달하는 거야.' 기대대로 온몸에 모래가 쌓인다. 그렇지만 쌓인 모래는 곧 끈적이는 진녹색 액체로 바뀐다. 나는 끈끈이 같은 진녹색 액체 위에서 발버둥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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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미래의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깨진 접시 조각을 발바닥과 발 허리에 넣고 천으로 꽁꽁 동여맨 후 걸었던 소녀들이 있다. 피를 내고 곪게 하여 발 허리는 솟고 드디어는 부러진다. 발의 성장을 멈추게 하여 조그만 발을 만들려는 거다. 발가락은 바닥에 붙어 피부가 되어 버렸다. 미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전족(纏足)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에는 서글픈 구석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발에 관심이 없다면 그녀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나의 이 아름다운 발을 왜 보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자기 발을 감싸고 있는 전족을 벗어던져야 한다. 이미 피부가 되어버린 흔적을 몸에서 떼어내야 한다. 사랑 때문이다.


그들에게 일상이라고 느낀 것을 해내는 순간 나도 그들의 세계에 합류했다는 들뜬 기분을 느낀다. 마치 그들과 하나가 된 기분이다. 그럴 때는 그들이 할 일이 있다. 나를 바라봐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무관심에 사랑을 잃어버린 전족(纏足)처럼 나의 발을 의자 밑으로 천천히 끌어당겨야 한다. 그들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내 손을 잡을 수 있다. 매몰차게 외면해 버리지 말아 줘. 그렇지 않으면 이 순간을 나의 수치의 목록에 또 하나 추가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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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그림자가 보인다. 나는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그도 천천히 뒷걸음친다.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된다. 다만 끔찍한 웃음을 보내고 있는 건 느껴진다. 내가 움직이자 한놈이 따라붙기 시작한다. 나의 발목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나는 그놈을 떼어놓으려 애쓴다. 빠르게 뛰어가면 빠른 속도도 따라붙고 멈추면 따라 멈춘다. 해 질 녘이 되어 어스름해지면서 그놈은 더 길어지고 나는 힘이 빠져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나는 그놈의 정체를 알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놈은 윤곽만 있고 변화무쌍하다. 시간이 더 지나자 층위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밀물처럼 다가왔다. 이제 그놈과 세상이 차츰 경계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세상과 하나가 된다. 나는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온 세상이 그놈들 천지이다. 이젠 온 세상이 나를 응시한다. 난 저들의 응시를 피할 수 없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갑자기 뛴다. 어딘가 출구가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난 다시 지치고 출구는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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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수가 다수가 되는 거


에너지


형태는 바꿀 수 있어도 그 절대량은 사라지거나 더 생기지 않는 것. 잡고 있던 물체를 놓으면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속도라는 운동에너지가 생기고, 운동에너지는 중력에 의한 위치에너지 영향이고, 물체를 들어 올린 위치에너지는 손이 움직인 것이고, 들어 올린 힘은 전에 섭취한 고기가 화학 에너지를 만들었기 때문이고, 고기는 생물이 섭취한 목초에서 온 것이고, 목초는 광합성 덕분이고, 광합성은 태양 때문이고, 태양은 핵융합 때문이고, 핵융합은 수소 때문이고, 우주의 수소는 빅뱅 때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빅뱅의 에너지가 계속 형태를 바꾸고 있다. 우리는 우주와 연결이 되어있다.



오일러 (1707~1783)


Dear. my Daniel Bernoulli!


나의 친구 베르누이, 자네의 지난 편지는 잘 받았네. 너무 걱정은 말게. 한쪽 눈마저 잃었지만 눈이 먼 사람들에게 일종의 보상은 남다른 감각과 다른 시간 감각이라네.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고,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로 몇 안 되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고 주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네. 광장 주변의 가스등이 확 타오르는 소리, 진흙과 똥이 찌그덕거리는 소리, 나무들의 떨리는 소리, 바람에 빨래들이 펄럭이는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커다란 짐마차의 바퀴소리, 말발굽 소리,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 광장에서 아이들이 움직이는 소리 등 모든 것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네. 물론 그들에 대한 충분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었다면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에 절망감을 느끼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겠네. 게다가 요란한 자기 연민으로 주변 사람들을 손사래 치게 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하루 20시간이 넘는 연구로 차례로 시력을 잃었기에 마음의 준비는 있었다네. 그래서 눈을 뜨는 순간마다 혹시나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희망은 없다네. 나의 기억에는 많은 수학적 사실과 아름다운 식들이 가득 차 있다네. 머릿속에서는 숫자와 멋진 수식들이 살아 움직이다 사라지고 있다네. 그 멋진 식들의 의미를 되짚어보면서 다음의 식을 만들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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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서 없음을 나타내는 수인 0과 자연수가 시작되는 1과 제곱해서 -1이 되는 허수 단위 i와 가장 완벽한 도형인 원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인 ∏, 그리고 자연현상에 자주 나타나는 수인 자연상수 e를 하나의 식으로 연결을 했다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식이라네. 세상의 존재의 본질을 아름다운 소네트처럼 보여주는 식이라네. 그리고 지금은 쾨니히스베르크 다리를 한 번씩만 거너면서 일곱 개의 모든 다리를 겹치지 않게 건널 수 있나를 생각해 보고 있다네. 유치한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라네. 이문제를 푼다면 위치 관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수학분야로 발전할 거라 생각하네. 그럼 다음 소식을 전할 때까지 몸 건강히 있게나.


sincerely, Leonhard Paul Euler



일관성- ①정중하게 넥타이 매고 출근했다가 되는 길 술자리에서 술잔을 던지는 일.

②내가 어느 날 당신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이제는 전화를 받지 않는 것


잔인함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와서 사랑한다고 할 때 드러나는 여자의 마음


정치 -'Look up'파와 'Dont look up'파의 끊임없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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