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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소리 Jul 16. 2022

ep.10 바람이 알려준 것

2022.06.05 죽령-비로봉-어의곡

소백산은 ‘바람’으로 유명한 산이다. 연희봉 대피소를 지나 정상인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은 사방이 뚫려 있다. 날씨만 좋으면 소백산맥이 훤히 보여 장관이지만, 소백산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풍경에 대해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한여름에도 ‘바람막이’가 필수일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불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어서다.


이날은 비까지 내렸다. 출발할 때는 구름만 있었는데 대피소에 가까워지자 비바람이 거세졌다. 대피소에서 몸을 녹이면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걱정이 앞섰다. 대피소에서 우비를 발견한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소백산맥(왼쪽)과 어의곡 계곡


산에서 맞는 바람은 도저히 이길 방도가 없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 몸을 휘감다 못해 사방으로 때린다. 방향은 가늠할 수 없고 대피할 곳은 없다. 그저 맞는 방법밖에 없다. 지난겨울 태백산에서도, 덕유산에서도 그랬다.


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몇 발자국 갔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우비를 써도 모자가 날아갈 것만 같아 챙을 붙잡고 걸어야 했다.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던 그때, 뒤에 오던 아저씨가 나를 앞질러 냅다 뛰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아저씨의 몸짓은 가벼워 보였다. 아저씨를 따라 뛰었다. 신기하게도 뛰어야 몸은 덜 휘청였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바람은 더 가혹했다.


솔바람이 아니고서야 바람은 늘 피하고 싶었는데 이날은 좁 이상했다. 바람 때문에 땀이 식어 점점 춥고, 바람 때문에 걷기 힘든데도, 바람 속에서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뛰고, 소리 지르고, 요란스럽게 바람을 통과하고 나니, 부정이든 긍정이든 어떤 감정도, 잡념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람 덕분에 홀가분했다.


나는 ‘지랄 총량의 법칙’ 만큼이나 ‘불행 총량의 법칙’을 믿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견뎌야 할 불행의 총량이 있다. 그 불행을 견디기 위해 우리는 자주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묻고, 나의 작은 행동에 의미 부여한다.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해야 불행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일이, 바람을 맞는 일이 나의 쓸모 있음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문하지 않아도, 바람을 맞아 빨개진 볼이, 얼어붙은 손이, 바람에 휘청이는 몸짓이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누군가의 딸이거나, 친구이거나, 선후배가 아니라, 오롯이 ‘나’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바람 앞에서 더는 나의 쓸모 있음을 묻지 않아도 됐다.


요즘은 산에서 맞는 거센 바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저 돌풍을 뚫고 나면 그 끝에 진짜 ‘나’를 마주하는 날이 올 거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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