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4 용마-아차산
가장 강렬한 '우중 산행'의 기억을 안겨준 곳은 한라산이다. 2020년 8월, 그날은 산 타기 좋은 날이었다. 구름이 살짝 꼈지만 풍경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해가 강하지 않아 여름치고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한라산 북벽을 병풍 삼아 도시락을 먹고 백록담에 도착해 사진도 실컷 찍었다. "비 온다는데 괜찮냐"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우려에 "무슨 비야, 날 엄청 좋아"라고 큰소리쳤다.
들뜬 마음도 잠시, 번개가 치더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늘은 순식간에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우산도, 우의도 없어,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소나기일 거로 생각해 바위 뒤로 피했지만 빗줄기는 더 거세졌다. '갈 지'(之) 자로 내리는 제주의 비가 몸을 세차게 때려 바들바들 떨렸다. 더 추워지기 전에 걸어야 했다. 성판악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날 얼마나 비를 많이 맞았던지, 집에 와 가방을 열어보니 지갑 속 명함까지 젖어있었다. 뉴스에서는 북한산에서 번개를 맞아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2020년은 최장 장마를 기록했던 해다. 한라산뿐 아니라 청량산, 우면산 등 여러 산에서 비를 맞다 보니 비 오는 산이 조금 익숙해지고 좋아졌다. 비가 오면 흙냄새, 풀냄새가 짙어진다. 비릿한 비 냄새와 자연이 뿜어내는 향이 뒤섞인, 특유의 향기는 비 오는 날만 맡을 수 있다.
지난주 오랜만에 봄비가 내리던 날, '용마-아차산'을 탔다. 용마-아차산은 서울 둘레길에 포함된 코스로 2시간 안팎이면 왕복으로 다녀올 수 있다. 가볍게 탈 수 있으리라 자신했는데 오판이었다. 예상보다 비는 많이 내려 빗물이 우의를 뚫고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아차산에서 길을 잃었다. 휴대폰으로 길을 찾으려 해도 액정이 젖어 터치가 잘 안 됐다. 멈추면 추워 계속 걸었고 점점 도시와 멀어졌다.
때마침 하산하려던 아주머니를 만나 천만다행이었다. 산길이 끝나고 마을버스에 탔을 때 그제 서야 '이제 집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차산역으로 하산해 떡볶이를 먹겠다는 계획은 틀어졌지만 빗물 젖은 빵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한라산도, 아차산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한라산은 계절마다 타봤고, 아차산도 처음은 아니었다.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라산은 길이 잘 닦여 있고, 아차산은 험하지 않아 인근 주민들도 자주 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착각이었다. 산에서 경험에 근거한 과신은 독이다. 날씨에 따라 산은 변화무쌍하고 길은 수만 갈래다. 내가 경험한 산보다 경험하지 못한 산의 모습이 많다는 사실을 난 놓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산을 많이 타다 보면 능숙해질 거라 생각했다. 마치 게임처럼, 산을 하나씩 깨다 보면 '만렙'이 되어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늘 잘 탈 수 없으며 어쩌면 등산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내 한계를 명확히 알게 되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믿고 최선을 다해 정상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포기하고 잘 내려오는 것도 중요하다. 올해만 탈 거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산을 오래 즐기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