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내 소개부터 할게요.
나는 전철 내부에 있는 손잡이랍니다.
아, 손잡이라고 해서 승객들 좌석 있는 위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손잡이는 아니고요.
정확히는 문이 열리는 벽 쪽에 붙어 있는
은색의 기다란 손잡이예요.
요즘 날이 더워서 우리 전철에서도
오전부터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기에
열차 안이 뜨겁다는 생각은 안 하고 지냈거든요.
나름 시원하고 쾌적했어요.
그런데, 토요일인 오늘 아침에
어떤 여자 사람 때문에
제대로 뜨거웠단 거 아니겠습니까.
날도 더운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이
나한테 얼굴을 가까이 막 들이대니까
어색하고 민망해서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아시나요?
꾸벅꾸벅 졸면서 자기 머리, 정확히는 이마를
나한테 살포시 기대기도 했다가,
쿵 소리 나게 박기도 하지 뭐예요.
내가 이때까지 지하철 손잡이 생이 몇 년인데
그렇게 얼굴을 가까이 마주한 인간이 처음이라
어찌나 심장이 쿵쿵거리던지 괴로웠어요.
바로 몇 분 전만 해도 이 승객은 멀쩡했어요.
10량 열차 8-4칸의 문 앞 손잡이,
내 앞에 딱 자리를 잡고 서더라고요.
이 손님은 우리 열차를 자주 타는
승객임이 분명했어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일단 타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앞으로 와서 섰으니까요.
어느 쪽 문이 계속 열리고 닫히는지를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지금부터 8개의 역을 지날 때까지
내가 있는 쪽의 문이 한 번도 열리지를 않거든요.
반대쪽 문만 8번이 열린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주말 아침부터 승객들이 많아서
앉을자리는 아예 없었고,
서있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어요.
그러니 열리지 않는 문쪽으로
자리를 잡고 선다는 건,
사람들과 덜 부딪치면서 편하게 설 수 있는
자리를 골라서 섰다는 걸 의미해요.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선 그녀는
이어폰을 꽂더군요.
그리고 손잡이인 나를 꽉 잡았어요.
마지막으로 눈을 감더군요.
어? 이 인간은 뭐지?
지하철에서 음악 감상을 하는데
굳이 손잡이까지 꽉 붙잡고 서야 하나?
나는 그런 생각부터 들더란 말이죠.
아무리 에어컨을 가동해도 요즘 덥잖아요.
내가 좀 예민한 상태였거든요.
열차 안에 사람이 좀 많아야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타다 보니
괜히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예민해지는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저기요. 날도 더운데 왜 뜨겁게
나를 붙잡고 그래요.
이봐요. 나는 좀 놓고 가죠?"라고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었지만,
인간의 귀에 내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죠.
다 큰 어른이 굳이 왜 손잡이를 꽉 잡는지
솔직히 좀 성가셨어요.
분명히 쾌적했던 온도였던 거 같은데
손아귀에 붙잡혀 있으니까 숨 막히고 더웠어요.
잠시 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그녀는 눈을 감고 음악 감상을 하는 게 아니라
자고 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 열리지 않는 전철의 문쪽 벽에 기대어
너무 피곤한 자신을 재우고 있었던 거예요.
마치 눈 감고 음악 감상하는 것처럼 서서
벽에 딱 붙어 선 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잠을 자고 있더라고요.
가만히 서서 가기라도 하면
잠을 자든 말든 상관없겠지만
나를 자꾸만 귀찮게 만든다는 게 문제였어요.
자꾸만 머리가 흔들리면서 내 앞에 들러붙듯이
서있는 승객이었죠.
"왜 자꾸 얼굴을 나한테 들이대요?
이봐요. 좀 떨어져요."
이렇게 가까이 오는 승객은 적응이 안 되어서
자꾸만 짜증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러다 아침부터 서서 자고 있던 이 승객과
눈이 띠용하고 마주친 거예요.
나를 꽉 붙잡고 서있던 그녀가
잠결에 휘청하더니 잠시 눈을 떴거든요.
아, 그런데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더라고요.
너무 피곤해 보였어요.
정말 밤새 한숨도 못 잔 눈이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딱 한마디 했어요.
"졸려..."
그 말을 듣는데 너무 불쌍해 보이지 뭐예요.
밤새 무슨 일로 잠을 못 잔 걸까 안쓰럽고
그렇게 서서 졸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나를 꼭 붙잡고 있었던 거구나 짐작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짜증 났던 내 마음이 사르르르 녹아버렸어요.
내가 그동안 인간들을 워낙 많이 봐서
인간에 대한 공감도나 이해력이 높은 편이거든요.
잠을 못 자서 피곤한 이 인간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죠.
내게 밀착하여 기대는 걸 모른 척 받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그래도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지하철의 손잡이잖아요.
책임감을 가져야죠!
그런데 이 여자 승객은 내가 너무 편한가 봐요.
너무 대놓고 이마를 붙이고 자는 거 있죠.
방금 전에 다짐했는데 금방 또 당황했어요.
"어... 어... 조금 떨어지죠?
너무 가까이 붙었잖아요."
아, 내가 아무리 은색의 차가운 이성을 갖고 있는
손잡이라고 해도 그렇지, 몸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 자꾸만 밀착을 하는데 당연히 떨리지 않겠어요?
이때까지 나한테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밀착시킨
인간은 없었단 말이에요.
앙 선생님 패션쇼에서나 볼 수 있는
이마 맞대기를 계속하니까 너무 떨리잖아요.
열차에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음에도
나는 자꾸만 열이 나면서 더웠어요.
지하철 손잡이 생의 처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그래도 참 다행인 건 그렇게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나를 꼭 붙잡은 손을 놓치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이마를 댄 채로 잘 자더라고요.
이번 기회를 거울삼아 인간의 자장가라도 하나
배워둬야 할까 봐요. 이렇게 서서 잠자는 승객을
또 만나게 되면 그땐 자장가 서비스로 모실 수 있게 말이에요.
혹시라도 내릴 역을 지나칠까 봐 걱정이 됐는지
한 번씩 눈을 번쩍 뜨고서 창밖으로 보이는
역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던 그녀였어요.
내릴 역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이내 마음이 놓인 듯
다시 나에게 이마를 대던 그녀였죠.
나에게 그렇게 마음껏 기대고 조금이라도
피로가 풀렸다면 좋겠네요.
그렇게 열심히 내게 기대 자더니,
내릴 역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눈을 뜨고 뒤돌아서 반대편 문으로
내리던 그녀였어요.
열차 안에서 만나는 많은 인간들이
안쓰러운 모습일 때가 종종 있는데요.
오늘의 그녀 같은 승객은 못 만나봐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날이긴 했지만,
덕분에 승객을 대하는 법을 하나 더 배운 날인 거 같아요.
다음에 8-4칸 문 앞 손잡이를 꼭 붙잡는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짜증 내지 않고
좀 더 편안하고 친절한 서비스로 모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