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가치를 알아볼 때
누군가의 가치에 값을 정할 때, 우리는 어떻게 얼마큼 값을 측정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나의 가치를 정할 때, 나는 어떻게 나의 가치를 받아들이는가? 나의 가치가 측정될 때, 세상에서 말하는 가치와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일치한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세상이 나의 가치가 빵 한 덩어리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나도 나의 가치를 빵 한 덩어리로 받아들인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어쩌면 사람들은 세상이 매기는 가치에 자신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저시급이라는 가치에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맞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내가 나의 가치를 정해진 틀에 맞추어 산다는 건 치욕스럽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저 그렇게 세상의 가치와 이치에 따라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최저시급에서 시작하여 3만 원, 5만 원 나의 가치를 올려나갈 때 한 달에 한 번 찍히는 금액에 흡족해할 때 나는 그렇게 세상이 정한 가치에 나를 욱여넣는다. 그리고 나는 나의 가치가 숫자로 값으로 매겨지고 있다는 걸 간과한다.
2025년 최저시급은 10,030원이다. 내가 기억하는 최저시급 중 가장 처음은 5,0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어떻게 왜 이 최저시급을 기억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십 년 전에 비하면 오늘날의 최저시급은 2배 가까이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가치가 두 배 올랐다고 할 수 있을까? 숫자만 봤을 때는 분명 두 배가 올랐을 거다. 그런데 그동안의 물가상승률과 노동력에 대비하여 가치는 아마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저시급이 정하는 ‘우리’의 가치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사회초년생인 만큼 이 정도의 돈을 받는 것이 아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최저시급은 8불 50센트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최저시급을 받고 일하면서도 나의 가치에 대한 의구심을 한 번도 품은 적이 없었다. 당연한 순리이며 이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누군가가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2,000억 원에 구매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신이 나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대령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의 노동력과 시간을 2,000원에 구매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콧방귀만 뀔 것이다. 감히 나의 가치를 이따위로 매기다니! 하며 분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는 나도 나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의 가치를 숫자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창작물’에 대한 가치는 어떠할까? 과연 내가 만든 ‘창작물’에 대한 가치도 나는 숫자로 판단하고 있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미대에 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9개의 작품을 만들었다. 주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3가지, 내가 버리고자 하는 3가지, 내가 원하는 3가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9개의 작품을 만들기까지 아이디어를 고민하고 공부하고 그리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아마 내가 이 작품을 위해 공들인 시간을 환산하면 100시간은 훌쩍 넘기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 100시간과 아이디어, 노동력의 가치는 무엇일까?
만약 나의 9개의 작품을 100억에 산다고 한다면 나의 시간당 노동력을 1억에 산다는 것이고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작품을 100만 원에 산다고 한다면 나는 다시 콧방귀만 뀌며 무시할 것이다. 나의 노동력은 1만 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나의 ‘창작물’ 또한 숫자로 가치를 매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내가 공들여 만든 작품의 아이디어를 ‘나’의 이름이 아닌 구매자의 이름으로 공개가 된다면, 단순히 나의 창작물만이 아닌 나의 아이디어와 이름, 저작권 등을 가치로 환산하여 2,000억 원에 산다고 한다면 나는 마냥 기뻐하며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까? 소셜미디어에 가끔 올라오는 질문 중에 만약 100억을 받고 일주일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무인도에서 살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0억을 받고 일주일간 무인도에서 사는 게 뭐가 그리 힘든가? 먹고 싶은 거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휴양지에서 살다오는 것과 똑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이어 다른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100억을 받고 내가 원하는 음식을 평생 못 먹는다면 하겠는가에 관한 질문에는 나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받는 100억이란 돈이기에 고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곧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내 ‘자유’에 관해 고민을 하기보다는 견디는 ‘시간’에 관해 고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건 내가 자유 없이 사는 것을 일주일 동안 견디는 것과 평생 동안 견디는 것의 차이였다. 내가 나의 작품은 100억에 쉽게 팔아넘기지만 나의 저작권과 아이디어는 쉽게 팔 수 없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나의 작품은 내 평생 동안 ‘나’의 작품이라는 것이 명확하지만 나의 저작권과 아이디어는 더 이상 ‘나’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을 거쳐 내린 나의 가치에 관한 결론은, 우리가 세상이 정한 우리에 대한 가치에 맞춰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가치가 평생 동안 최저시급이 아니라는 희망 혹은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변화하는 가치에 욱여넣을 수 있는 이유는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변하는 가치에 속아 나를 정해진 가치에 욱여넣으며 살아가는 순간, 그리고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고정된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우리는, 한 순간에 쌓아 올린 나의 가치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 최저시급에서 성장하여 계속해서 더 올라갈 줄 알았던 나의 가치가 어느새 중년이 되자 성장이 더디다 결국에는 가치가 퇴보하기까지 한다. 그렇다. 세상이 정하는 가치는 언젠가는 무너져 내린다. 내가 나의 노동력과 시간과 체력을 예전만큼 쓰지 못하게 될 때, 나의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나의 가치는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란 걸.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가치와 내가 말하는 가치가 일치하는 게 바로 문제라는 것. 세상은 나의 가치에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 바로 내가 나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하면서도 혐오하는 것은 숫자로 매겨진 가치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신중하게 조심스럽게 숫자로 매겨진 가치를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