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지 않은 지인이, 감기에 걸렸다고 하길래 나는 배려의 마음을 한가득 담아 약봉지와 전복죽을 사들고 갑작스레 지인의 집으로 향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는 식은땀이 뻘뻘 나는 초췌한 모습의 지인을 집 앞에 불러내어, 나의 배려 담긴 선물을 전해주고 나는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필히 나의 세심함에 감동받았을 터였다.
한날은 지인이 초록색의 괴상한 모자를 쓰고 나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곤충 같아 보였다. 나는 그 지인이 남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못하도록, 그것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충고를 해주었다. 지인은 새로 산 모자가 비판받아 속상한 눈치였지만, 뭐 어떠랴! 나의 꼼꼼하고 직관적인 충고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배려
[명사]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나는 이렇듯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쓸 때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인용하기가 딱이었다.
‘저는 타인을 잘 도와주고 배려심이 깊으며 …’
나는 그렇듯 나만의 배려심을 무기 삼아, 모든 행동을 면죄부 받길 원했다. 그것은 상대방을 귀찮게 하려거나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닌, 나만의 배려였기 때문이다.
남에게 배려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듯 뿌듯함을 느끼곤 하였다.
‘배려’라는 말은 이타적이기도 하고 배타적이기도 하다. 내가 배려한 행동으로 인해서 나는 사회가 정립한 선한 사람으로서 한 발짝 도움닫기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인 마냥 스스로를 합리화하곤 했었다.
그것은 남을 위함과 동시에 남을 배척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 무시하곤 했다. 사람들은 원래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옳은 거라 믿고 싶기 때문이겠지.
점심메뉴를 고르기 전, 동전을 던져 앞 뒷면에 판가름을 맡긴 그때. 사실 나는 그 동전이 공중에 떠 있을 시점, 짜장면이라는 앞면이 나오길 소망하고 있었다.
앞면이 나올 때면, 내심 무언가 다행이라는 듯한 마음이 들었고, 뒷면 짬뽕이 나올 때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동전을 공중에 던지곤 하였다. 이렇듯 나만의 정답은 미리 나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 수많은 가설을 세웠다.
배려라는 말은 이와 같더라. 나는 그것이 나만의 절대적 선이라 생각하였는데, 받아들이는 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수십 번 앞면이 나올 때까지 동전을 던지는 나만의 고집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