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조언
18. 내가 너를 이끌어 줄 지니.
우리는 남에게 도움을 준다거나, 깨닫게 해 준다는 등의 핑계로 ‘조언’하기를 좋아하곤 했다.
힘들고 우울한 당신에게 나의 말은 ‘도움말’ 정도가 되는 듯, 그렇게 위로의 말을 전하곤 했다.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은 나의 진심 어린 ‘충고’를 무시하는 비판적인 사람이며, 나의 말을 받아들여 준다면 그것은 ‘조언’을 받아일 줄 아는 오픈마인드의 사람이었다.
조언과 충고는 같은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조언은 무언가 예수 같은 선의의 인간들이 하는 말인 듯, 말 그대로 ‘착한 말’인 것 같았고, 충고는 제까짓게 주제넘게 나의 결함을 상기시키는 ‘나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조언
[명사] 말로 거들거나 깨우쳐 주어서 도움. 또는 그 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특히 젊은 세대 층에서 특이점을 꼽으라면 나는 그것을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 운동 정도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본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와 억압이라는 현실적 상황을 자각하고, 여성의 의식을 개조, 남성 지배 구조 대신 여성의 가치 체계를 재정립하려는 것] 따위에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현대사회의 남성 중심사회를 비평하고, 여성의 짓눌린 자유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요즘 자기 자신을 자칭 ‘페미니스트’하는 극성의 사람들을 보면 나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시각이었다.
(극성의) 페미니스트 들은 아직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여성들을 답답해하기도 하며, 자신이 선구자들이라도 되는 것인 냥, 매트릭스의 빨간약 파란 약 중, 빨간약을 아직 먹지 못한 여성들에게 계속해서 깨우침을 주려고 하고 있었다. 빨리 그 가상세계에서 나오라며, 당신은 아직 깨닫지 못한 자라며, 페미니즘 운동을 하지 않는 여성, 혹은 남성들에게 돌을 던지곤 하였다.
필히 잘못된 것이 맞다. 한국 여성들 중,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여성들은 절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남녀 임금격차도 그렇고, 직장 내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출산 육아 및 살림, 국제순위 121위로 기록되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 10%대 등등을 보아도 우리는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렇게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고 있는 시스템에 대해 반기를 드는 바이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작가에게
“한국 여자들 그 정도면 배가 불렀지.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인도에 가봐, 아니면 일부다처제 국가들인 중동에 가봐.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 줄 알아? 남자들은 군대도 가는데.”
하는 사람들은 중등교육을 다시 받고 이 책을 읽어달라 부탁하고 싶다. 그 나라의 사회체계가 그리도 유토피아적이라 생각이 든다면 그곳에 가서 살면 되는 것이고, 군대는 모든 것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요즘 페미니스트들이 그다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제껏 21세기를 살아온 여성들에게 더욱 많은 요구를 하곤 했다. 이것은 안돼, 저것도 안돼. 그건 코르셋이야. 하면서 그들의 법체계는 더욱더 까다로워졌다.
2018년도 평창올림픽의 시상 도우미 의상을 살펴보자. 그 옷은, 여성복은 허리라인이 잘록하게 들어가 있었으며, 힙라인은 풍성하게 보이게끔 A라인으로 퍼져있는 치마 형태였고, 남성복은 일자 두루마기 형태의 바지였다. 이것을 보고 댓글로 몇몇의 페미니스트들은 분개하곤 했다.
여성복은 왜 불편한 치마 형태이며, 몸매 라인이 드러나는 옷이어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의상학을 공부해본 적이 있는 내가 조심스레 의견을 적어보려 한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비해서 허리라인이 들어가 있고, 힙라인은 허리에 비해 대략 6~8인치 정도 크다. 이것을 우리는 이상적인 신체라고 표현하는데, 남성복은 이의 기준이 조금 다르다.
여성처럼 몸의 곡선이 많지 않고, 골반 또한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남성복과 여성복의 기본적인 패턴 제도부터가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데, 여성들은 팬츠 front 패턴 중, 가랑이를 그릴 때, 평균적으로 4cm를 늘리는데, 남자들은 돌출된 생식기 구조 때문에 이보다 1~2cm 정도 더 길게 그리곤 한다.
패션계에서는 이러한 1cm 차이를 예술이라거나,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제아무리 비싼 디자이너 브랜드보다, 시장바닥에서 산 너덜너덜한 목 늘어난 티셔츠가 더 마음에 든 적이 우리는 제법 있을 터였다.
이러하듯, 현재 유통되는 기성복들은 소비자의 평균적인 신체에 알맞게끔 통계치를 내린 후에 출시되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원초적으로 생겨 먹었을 뿐인 남성의 신체, 여성의 신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앞서 말한 평창올림픽 시상 도우미 여성복을 다시 살펴보자. 허리라인이 들어가 있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두루마기 형태보다 몸을 잡아주어, 활동의 편리성을 주었다.
힙라인이 드레스처럼 풍성한 것은, 여성의 엉덩이가 남성보다 비교적 큰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는데, 꽉 종기는 힙라인 보다 여성에게는 a라인의 형태가 조금 더 효율적이곤 하다.
치마는 여성의 생식기가 안쪽에 있기 때문에, 질염 같은 성병에 쉽사리 노출되기 일쑤였다. 이에 통풍이 잘 되는 치마 형태 또한 질염을 예방하기는 안성맞춤이다. 허나,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디자이너의 의도를 무시한 채, 무조건 여자는 남자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리타 패션’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아마도 머리에는 커다란 리본, 90년대쯤 유행한 무릎 위로 올라오는 양말, 세일러문 같아 보이는 교복 패션, 치렁치렁한 레이스들이 떠오를 것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주인공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로리타 패션을 극혐 하곤 하였는데, 로리타 패션의 어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좋아해야 할 것이다.
이는 원래 여자력(여성의 아름다움과 그들이 가꾸기 위한 노력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인데, 일본 사회에서는 뜨개질을 한다거나, 도시락을 싼다거나 하는 여자여자한 모습을 높게 일컫어 불리우는 말이었다.
이에 반기를 든 일본 여성들은 ‘니들이 좋아하는 여자력(女子力)의 극치를 보여주겠다!’ 하며 비꼬기 시작한 것이 로리타 패션이다.
하지만, 이러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들은 또한 돌을 던지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소아성애자가 생기는 것이며 여성 인권이 높아지지 않는 것이라고.
패션 이야기는 끝마치우고,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 보자.
나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 때문에, 한 번씩 투명 젤 네일을 하러 샵에 가곤 하는데, 이것은 페미니스틀에게 죄악으로 꼽힌다. 남자들은 굳이 시간을 내서 네일숍에 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미용실에 가는 것이 꽤나 귀찮아서, 머리를 락커처럼 치렁치렁 길게 기뤄서 묶고 다니곤 하였다. 하지만, 숏컷을 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들은 지탄받아 마땅했다.
여름이 되면 까슬까슬한 느낌도 싫고 습한 것이 싫어서 레이저 제모나 왁싱을 하곤 하였는데, 이것은 남자들이 신경 쓰는 분야가 아니다. 이 또한 코르셋이다.
그들은 남자들이 하고 있는 행세를 무조건적으로 모두 부러워하곤 하였으며, 자신을 치장하려 돈을 쓰거나 시간을 쓰는 행위를 싸잡아 페미니스트들의 진보적인 발걸음을 막는 악행이라고 정의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씩씩하게 발걸음 하던 그들은, 더 꽉 조인 코르셋 속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이라는 행복으로 가득한 천국의 손길을 뿌리치는 것은 나의 진리 담긴 말을 ‘충고’로 받아들이는 미개한 것들이었고, 그 손을 잡는다면 그것은 천국의 세상으로 향할 ‘조언’을 받아들일 열린 사람들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충고 일까 조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