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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공 Feb 03. 2022

25. 나라말싸ᆞ미

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텔레파시



25. 나라말싸ᆞ미   

   

까방권이라고 들어보았는가. 이것은 [까임 방지권]의 줄임말로,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대단한 업적이 있다면 그것을 용서해 주는 면책부 이다.


한국어로 말장난하기를 좋아하는 작가에게 훈민정음은 빠질 수 없다. 

세종대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종대왕에게  까방권을 주곤 하였다. 나와 당신이 만나는 연결고리인 훈민정음을 창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 위인(偉人)이라 후세대는 일컫는다. 나 역시, 중국의 상형문자 보다야 단순화된 한글을 너무나도 간편하게 쓰고 있는 바, 세종대왕님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하지만, 세종실록을 읽어 보고 나서는, 몇 가지의 사실은 까방권 획득을 위해 교과서에서 삭제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수십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다음만 나열해 본다.     




민간의 폐해를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대의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는 가벼운 일이나 사대를 성실히 하지 않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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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에 기근이 들었는데, 강원도가 더욱 심하였다. 창고가 거의 비어 백성을 구휼할 수 없고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7월 9일     




이 외에도 백성들이 흙을 파먹었다거나, 도적질이 난무하였으며, 어린아이가 굶어 죽고 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훈민정음은 원래 중국 명나라 때의 홍무정운(洪武正韻)에서 출발한 문자인데, 한글은 마법처럼 뿅 하니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중국의 상형문자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카피본이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70퍼센트는 실은 한자어이다. 

중국어를 공부한 나는, 한국어와 중국어가 얼마나 밀접하여 있음을 체감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你好(니하오 ni hao)라는 중국어를 풀어보면, ‘너 니’ 자에다가 ‘좋을 호’를 사용하여, 너의 안녕을 묻고 있다. 

밥 먹었냐는 의미인 니츠팔러마를 한번 살펴보자. 你吃饭了吗(ni chi fan le ma)라는 단어는 ‘너 니, 더듬을 흘, 밥 반, 마칠 료, 아편 마(무슨, 어떤)’라는 단어인데, 

한자 그대로 말하면 니흘반료마 가 된다. 우리는 이렇게 조금 더 치읓과 피읖자를 적절히 활용하기만 한다면 쉽게 중국어를 마스터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세종대왕님이 카피하신 한글 속에서, 더욱더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다. 한글로 인해서 후세대에 기록할 문서가 조금 더 간단명료 해졌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문자(文字)’가 존재하지 않지만, 지금껏 미스터리로 이어지고 있는 잉카제국이 더욱더 놀랍고 대단할 뿐이다. 잉카제국은 15세기에 존재하였지만, 단 하나의 문자도 남기지 않았으며, 

대신 몇 세기를 걸쳐서도 무너지지 않는 테크놀로지의 집합체인 건축물이나 의료기술을 통해서 후세대가 그 위대한 문명을 짐작할 수 만 있다. 


피라미드라던가, 마추픽추 같은 위대한 건축물은, 과학이 나름 발전하였다고 자부하는 현세대가 모방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고대 문명은 꼬부랑 그림만 남겨놓았지, 한마디의 언어조차 남기지 않았다. 

문자와 언어는 실로 오해와 오류가 많다. 우리는 제한된 문자보다야, 위대한 건축물에 감동을 받은 적이 많을 것이다. 말소리와 문자에는 필히 한계점이 존재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아니하다.

 

나는 이것을 말보다 행동이라고 표현하겠다. 


우리가 그리도 나라의 자랑거리로 칭송하던 한글은 사실 언문(諺文)으로 불리었다. 한글은 현세대 표현법이다. 언문은 ‘상말 언’, ‘글월 문’ 자로 직역하면 ‘상스러운 문자’ 정도가 되겠다. 

그 시절 명나라의 눈에는 조선이 하찮은 언어를 쓰는 속국으로 보여 칭하였거나, 세종의 눈에는 언문을 사용하는 백성들이 미개하고 불쌍해 보였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국어를 개발하신 게 아니고, 홍무정운에 원래 있던 문자를 변형하신 것이다. 

나조차도 미세먼지를 그렇게 날려 보내는 중국이 밉지만, 중국 유학시절 무례한 사람들 여럿 만나긴 했지만, 사실 위대한 한국어는 그들이 빌려준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기승전결 중 결 정도만 보고 있구나. 


한글은, 문자는 사실 답답하다. 문자는 본래의 목적이 지식의 계승 정도일 뿐이니라. 

우리가 책을 읽기 싫어한다거나 공부를 하기 싫은 이유도 이러한 문자의 한계점 때문이겠지. 

활자가 와르르 쏟아지는 문서를 볼 때면, 졸리기만 할 뿐,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우리는 그래서, 옆에서 직접 소리 내어 말하고 읊어주는 선생님의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이 조금 더 쉽더랜다.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촉감과 눈빛,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그 무언가 일지니라. 나는 다음과 같은 부등호를 사용하여, 언어의 미개함을 정립해본다.

     

문자 < 국어 < 시각 < 촉각 < 텔레파시

     

우리는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말하지 않고 한 번 더 바라보고 손잡아주며, 텔레파시를 보내보자. 미개한 문자 따위에 얽매여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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