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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공 Feb 02. 2022

23. 묵언 (默言)

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침묵



23. 묵언 (默言)     


나를 타인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적이 많았다.

누구에게는 선(善) 하다 표현될 수도, 다른 누구에게는 악(惡)하다 표현될 수 있듯이, 인간은 입체적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나를 표현해줄 ‘사용설명서’ 따위가 없어서, 나는 이따금씩 내가 누군지 궁금했다.


당신 또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알 수 없는 제 마음을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당신들에게 다이어리 쓰는 것을 추천한다. ‘나 사용설명서’를 말이다. 일기를 쓴다거나 다이어리에 메모하는 습관은 그닥 대단한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부터 나열해 보자.

     

좋아하는 것 – 체리, 멜론, 공차 망고 요구르트, 로드 스토우 에그타르트, 닥터큐 젤리, 간장게장, 당근케이크, 비오템 수분크림, 페코, 노란색, 헬렌 켈러, 피라미드     


싫어하는 것 – 비둘기, 소음, 고음, 길을 막는 행위, 번데기, 뜨거운 밥, 비린 생선, 알코올이 들어간 화장품, 잔꽃무늬, 딱딱한 복숭아, 습도 60 이상, 벌레     


나의 취향을 아무 순서 없이 끄적여 보곤 했다. 앞뒤 맥락 없이 써내려 가다 보면, 내가 평소 의식하지 못하였던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어서 신기하곤 하였다.


나는 단기 집중력이 강한 편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시간에 들리는 조그마한 소음을 매우 거슬려하곤 했다.

애써 집중한 그 시간에 들리는 그것이 고음일 때면 거의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나는 이러한 데이터를 조합하여, 누군가 내게 이상형을 묻게 된다면 조금 더 담백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목소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더라. 나긋나긋 졸리듯 말하는 목소리를 가진 상대에게 나는 홀리곤 하였다. 이렇듯 작가는 오고 가는 소리를 꽤나 중요하게 여겼는데,

나는 ‘침묵도 대답이다’ 하는 글귀를 몇 번씩 되씹어보곤 한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때면, 조금 걸음이 느린 나에게 상대방은 재묻곤 하였다.

당신은 왜 나에게 묻지 않는 것이냐고. 왜 나에게 궁금한 것이 없느냐고. 나의 하루가 궁금하지 않냐고 말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나의 애정표현이 너무나도 부족한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든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관심해 보이는 내가 지친 것인지 먼저 떠나가 버리곤 했다.

나의 침묵이 상대방을 그리도 아프게 하였음을 나는 자각하지 못했다. 이미 떠나가 버린 이들에게 기회가 있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싶다.     


“질문하지 않은 것은, 당신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었어. 내가 알았으면 좋겠는 것이라면 당신은 내게 말을 했을 것이고, 몰랐으면 좋겠다 싶을 것이니 말을 하지 않은 것 아니니.”

    

나는 당신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백문백답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어려워할 수도 있는 대답을 강요하지 못했는데, 그런 나의 침묵이 상대방의 가슴에 칼을 꽂았을 줄이야.


나는 참으로 계획이 없다. 이 글마저도 목차라던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해 놓지 않고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 습작이 그리도 두서가 없겠지.


사이가 깊은 지인들을 만날 때도 그리하였다. 일단 만나고 본다. 만나면 뭐라고 할 것이 생기겠지, 먹고 싶은 것이 생기겠지 하고 말이다.

허나, 반대로 그닥 사이가 깊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늘상 ‘미래’가 필요하였다. 내일 무엇을 할 것이며, 오늘 만남의 주제는 무엇이냐 같은 이유가 있어야지만 우리는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우리는 상대방을 만날 때면, 그 사람과의 미래를 점쳐보곤 한다.

이 사람과 이걸 하면, 이 사람과 결혼하면, 이 사람과 함께 살면. 하고, 미래가 몰입이 잘 되는 상대방을 만날 때면 우리는 그 상상하는 시간 속에 두근거리곤 한다.

하지만, 나는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어느 누구와의 미래도 꿈꿀 수 없었다.  

    

“내가 돈이 없어져도, 내가 쭈글쭈글 늙어도 나랑 함께할 거야?”   

  

하는 질문에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내가 그걸 어찌 아나 이 사람아. 남산타워에 자물쇠를 걸며 사랑을 맹세했던 수많은 이들 중에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나.

그것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유하고 세련된 당신이라도, 가난하고 늙은 당신이라도. 나는 당신의 과거와 현재를 사랑했을 뿐이다. 미래의 당신은 없었다.

나는 지금 내 눈앞에 침묵하고 있는 당신이 그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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