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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휘지 Oct 03. 2022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힘드신 분들께

네게 그토록 쉬운 일이 내겐 왜 이리 어려운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B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배 째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이었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1년 더 할 것인가’를 두고 아빠와 한 바탕 서로의 마음에 칼집을 내놓은 뒤 B를 만나 들었던 말이었다.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저 문장은 내게 희망처럼 들리는 동시에 절망적으로 들렸다. 세상의 어떤 문장들은 내 세상에 도저히 닿을 생각을 안 했다. 아빠 앞에서 언제나 틀린 사람이었고 게으른 사람이었으며 부족한 사람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음에도. 학교에서 모범상을 받아와도. 몇 번의 수술을 거듭하고도 자녀를 위해 열심히 회사에 출근하는 50대 남성의 입장에서 나는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자라오면서 주변 또래들에게 매번 듣는 말이 있었다. 왜 이렇게 잡혀 사냐는 말이었다. 한 번은 저항도 하고 시위도 해보아야 한다고. 그렇게 너의 진심을 설득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내게는 오를 수 없는 산처럼 느껴졌다. 왜 누군가에게 쉬웠던 일이 내겐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지 용기 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엄마의 알코올 의존증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7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책상 밑을 들여다보다가 어두운 갈색의 페트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엄마는 아빠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집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술에 취해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날에는 학교에 다녀와 아빠가 퇴근하기 전까지 거실에 흐트러진 맥주병들을 치우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알코올 의존증은 내가 몰랐던 시절부터 있었고 그 증상을 내가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단순히 알코올 의존증이었다면 치료를 받으면 되었지만 엄마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술에 의존한 상태였다. 엄마가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일이 14년 동안 지속되었고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빠는 젊은 시절 이식받았던 신장에 문제가 생겨 다시 혈액투석을 시작하셨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주일에 세 번 혈액투석을 해 퇴근하시면 엄마한테 맞아 시퍼렇게 멍이 든 동생과 울고 있는 내가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죽지 못해 살았고 또 간절히 죽음을 바랐지만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고통뿐인 집에서 아빠가 떠나버리진 않을까 늘 무서웠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우리를 버리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새 출발을 시작할까 두려웠다. 아빠는 어른이었기에 돈과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여전히 보호자가 필요했고 돈이 필요했고 사랑이 필요했다.

  나는 아빠가 어느 곳으로도 우리를 두고 가지 않도록 성실하게 살고자 다짐했다. 내 동생은 아직 어렸고 아빠는 엄마와 의논해야 할 일을 내게 털어놓으실 때도 많았다. 물론 그건 아빠가 겪는 고충의 1g도 되지 않았을 거란 걸 알고 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빠는 보습학원을 다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지만 엄마의 병원 입원비와 혼자 두 딸을 감당해야 하는 아빠의 쭈글쭈글한 두 손을 보며 나는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나는 자기 주도 학습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이해가 안 되는 수학 문제 앞에서 무너질 때마다 우리 가족과 우리 집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잔인하게도 나는 아빠가 우리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싶었다. 아빠의 인공혈관(만성신부전증 환자가 직장에 다니며 혈액 투석을 하기 위해서는 팔에 인공혈관을 심는 수술을 해야 한다.)이 막혀서 수술을 해야 했던 날에는 아빠를 위해 꼭 의대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의대는 가지 못했다.


  이런 내게 아빠의 삶이란 가족을 중심으로 도는 위성과 같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아빠의 감정과 아빠의 삶에 지극히 동화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서도 일하는 아빠의 모습이 생각났고 수학여행을 가도 아빠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는 아빠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 아닌데도 성적이 낮으면 성적이 낮은대로 성적이 높으면 높은대로 내 미래보다는 아빠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아빠가 실망하시겠지. 아빠가 좋아하시겠지. 나는 나도 모르게 늘 내가 되는 꿈을 꿔왔던 것 같다.

  

부모가 자녀에게 헌신하고 희생했으니 자식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마음. 그리고 효도. 사회에서 이런 것들은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당연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서도 천륜 지옥이라는 개념이 있지 않나. 

  늘 아빠에겐 고마운 마음이 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빠한테 고마웠던 마음만 남기고 싶다. 엄마의 산후우울증으로 생긴 알코올 의존증과 내가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실과 이젠 내가 다른 삶을 꿈꿔보고 싶다는 마음. 이 중 어느 곳에도 내가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할 지점은 없다. 



  아빠의 다정했던 격려와 "날 위해" 한다는 거친 폭언들은 카페인과도 같았다. 어떤 날엔 나를 각성시키기도 했지만 내 속을 쓰리게 만들기도 했다. 끊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게 과연 정답일까.’라는 생각에 관자놀이를 짚었고 천륜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날카롭게 내리 꽂혔다. 하지만 이것도 모두 금단증상 중 하나이리라. 부모님께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익숙해지면서 곧 이런 금단증상도 없어지기를. 시간의 힘을 빌려 바랄 뿐이다.


 언제나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온 사람들. 가족과 심적으로 많이 동화되어 있는 사람들. 혹은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폭언을 들어온 나 같은 사람들(나는 저 셋 모두에 해당된다)이라면 어려운 게 당연하다. 부모를 설득하는 일, 부모와 맞서 내 의견을 조리 있게 전달하고 주장하는 일. 아빠의 매서운 눈앞에만 서면 목소리부터 떨리기 시작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당장 부모를 설득하지 못해도 괜찮다. 당장 부모와 맞서지 못해도 괜찮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소통의 방식이 있으니까. 살기 위해 매번 먹이를 능동적으로 쫓아야 하는 사자의 삶, 그 반대편에는 매일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하는 가젤의 삶도 있다.


  사실 나 역시 부모님을 조리 있게 설득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과의 갈등을 힘들어하는 분들께 희망적인 말씀을 드리지 못해 속이 쓰리다. 하지만 우리의 방식이 틀린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나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하더라도 때론 숨을 죽이고 천천히 때를 기다려도 늦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는 언젠가 맞서고 싶지 않아도 맞서야 할 때 온 힘을 쏟아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와 맞서는 일보다도 스스로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돌보는 일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도 당신의 감정이 어느 곳에서 태어나는 것인지 생각해보셨으면 한다. 나처럼 내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미안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에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는 것은 아닌지. 한겨울 차가운 바람이 불 때 이 바람이 나를 할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면 바람은 그저 그곳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살아가며 우리는 ‘내가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며 살아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게 아닐까. 이제는 그런 악몽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도.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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