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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Dec 01. 2022

노숙자 밥을 얻어먹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다. 이 소동은 지하철을 잘못 타면서 시작된다.


 팔레르모에 가려고 지하철 H노선을 탔다. 이상하게 지하철 역들의 이름들이 낯설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여행한 지 일주일쯤 돼서 이제 지하철 역들 이름이 익숙했는데, 그날은 처음 보는 역 이름들이었다. 아. 지하철을 반대방향으로 탔구나. 사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종종 있는 있어서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지 뭐.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이 지역도 구경해볼까? 마침 Parque Patricios 역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내리네? 혹시 이 동네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근사한 곳인가? 나도 따라 내려본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구글맵을 켠다. 주위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본다. 평점이 무척 높은 카페를 발견했고, Patricios 공원을 지나 이곳을 가보기로 한다.

 공원은 크고 한적했다. 요가를 하는 모임도 있고, 데이트를 하는 연인도 있다. 오늘 하루는 이 한적한 동네에 일원이 되볼까.


 카페에서 알베르 까뮈 '이방인'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슬슬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 나섰다. 때마침 가판에서 도시락을 판매하는 상점을 발견했다. 길에서 그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뭐지?! 맛집인가! 나도 이 도시락을 먹어보고 싶다. 관광객들이 자주 가는 식당 말고, 현지인들이 평소에 먹는 음식. 하지만 내 옷차림도, 얼굴색도 이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괜히 눈치를 본다. 나를 빼고는 모두 편한 옷차림, 솔직히 남루한 행색이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가판대는 우리나라 함바집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날 보는 게 느껴진다. 난 멀리 가서 지갑에서 1500페소(한화 15000원)만 꺼내서 주머니에 넣었다. 소매치기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가판에 가서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로 더듬더듬 물어본다.


 "cuanto cuesta?" (얼마예요?)

 "블라블라... gratis ... 블라블라..."


 열심히 설명해주시는데 못 알아들었다. 다행히 유일하게 내가 아는 단어가 딱 꽂혔다. gratis. 공짜라는 단어다.


 "gratis? por que?" (공짜라고요? 왜요?)

 "블라블라..."


 듀오링고로 연마한 내 스페인어는 물어볼 수는 있지만 답을 이해할 순 없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판 주인은 나로 인해 분주해졌다. 이미 도시락이 다 팔리고 없었는데 분주하게 움직이시더니 나를 위해 도시락 하나를 뚝딱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또 나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다.


 "블라블라... Lunes, Martes, Jueves" (...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Si Si gracias"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에 이 가게가 연다는 말이구나! 몇 개 단어라도 듣고 대강의 의미를 파악했다. 아르헨티나에 오기 전에 몇 달 동안 듀오링고로 공부한 보람이 있다. 여행자라 다시 올 일은 없지만 또 오라고 문을 여는 시간까지 알려주다니 참 친절한 가게다.

 근처에 있는 공원에 이 도시락을 가져가서 먹어야겠다. 열심히 걸어가는데 나랑 같은 도시락을 받은 분이 나에게 이거 맛있다고 먹으라고 자꾸 권한다. 나는 공원에 가서 먹을 거라고 답하니 "Muy bien!" 하고 격려해 주신다. 공짜밥을 받았는데 격려까지 받을 일인가 싶어서 좀 의아했지만, 이곳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에 대한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이곳에서는 아주 흔한 고기튀김과 샐러드, 후식 귤까지! 균형 잡힌 탄단지(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에 비타민까지 챙겨주시다니. 게다가 맛이 깔끔하고 재료들이 신선해서 놀랐다. 이렇게 감사하게 공짜로 한 끼 잘 해결했다.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민박집 사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오늘은 뭐하고 놀았어요?"

 "오전에는 카페 가서 시간 보내다가, 오후에는 팔레르모 다녀왔어요. 그런데 점심을 공짜로 얻어먹었어요."

 "네? 무슨 말이에요?"

 "Parque Patricios 역에 젊은이들이 많이 내리길래 따라 내렸거든요. 그 인근 길가에 도시락을 파는 가게가 있길래 얼마냐고 물어봤는데 그냥 도시락을 공짜로 주던데요?"

 "그래요? 무슨 일이지? 가게 이름이 뭐예요?"

 "(사진 찍어온 가게 간판을 보며) Comedor Comunitario 네요"

 "(잠깐의 정적) 어머, 거기 노숙자 밥 주는 데는구나. 무료급식소에서 밥 얻어먹고 온 거예요? 푸하하. 그리고 Parque Patricios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린 거는 거기서 버스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에요."


 그렇다. 그곳은 무료급식소였다.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은 건설현장 노동자가 아니라 그냥 노숙인들이었다. 나에게 Muy bien을 외쳤던 사람들도 노숙자였겠지? 실소가 나왔다. 나에게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에 밥을 준다고 굳이 가르쳐준 과도한 친절이 생각나서.


 여행이 끝나고 뉴스들을 찾아보니, 아르헨티나 경제난으로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한 끼가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갔어야 하는데 내가 뺏어먹었으니 민망하다. 그리고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그분들께도 감사할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팔레르모의 줄 서서 먹는 고급 레스토랑보다 무료급식소에서 먹은 도시락이 더 깊이 기억에 남는다. 관광객을 위해 영어가 준비된 점원이 기다리고 있는 깔끔한 식당보다, 그날 내가 방문한 그 급식소가 진짜 아르헨티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받은 뜻밖의 호의. 이건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지하철을 잘못탄 덕에 별 일을 다 겪었다.


본 글은 2022.12.01 다음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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