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깨닫는 아빠 마음
아빠 생을 통 틀어 이렇게 아픈 적이 처음이라, 아빠는
많이 놀란 거 같았다. 그냥 ‘죽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하며 정하는 내 모습에 꽤 많이 놀라셨다.
아빠는 나를 표현하길 ‘거저 키운 자식’이라 했었다. 해준 게 많이 없는데도 바르게 잘 커줘서 고맙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나에게 뭘 바라신 적이 없었다.
나도 어느샌가 그게 당연해져서 아빠는 강한 사람이니까. 아빠는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가 평생 그렇게 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도..
아빠가 아프고 나서야 아빠의 주름이, 세월이 내게 크게 다가왔다.
크고 태산 같았던 아빠는 없고, 정말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매일매일 얼굴 보며 살 땐 몰랐다가, 결혼해서 떨어져 살다 보니 아빠의 시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아빠가 아픈 것이 하늘에서 내게 주는 기회 같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지금 잘해드리라고.. 이제는 내가 아빠를 보호해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라 느꼈다.
그 병원을 퇴원하자마자 주변에 도움을 청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수소문했다.
수술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차에.. 아빠는 수술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전에 입원했던 지역 대학병원 병실에 뇌 수술한 사람들이 입원해 있던 걸 며칠을 지켜봤기에 두려움이 커질 대로 커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무작정 거부하지 않도록 아빠를 설득했다.
병원 세 군데를 정해 수술 말고 시술이 가능한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서 하자. 혹여 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거든 아빠가 보기에 제일 믿음직스러운 의사 선생님으로 정하자!라고 이야기 끝에 병원투어를 진행했다.
내 지인이 직원으로 있는 병원 뇌혈관센터 담당의 선생님께 진료를 가장 먼저 보았는데, 다행히도 시술이 가능하다고 했고.. 담당의 선생님도 너무 친절하셨다.
서울 메이저 병원에 담당의 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친절함이었다. 전국 각지에 수많은 환자를 보시면서도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모습에 믿음이 갔다.
내 입장으로선 지인이 있으니 좀 더 안심이기도 했다. 그저 물어볼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 병원에서 진행하기로 마음먹고 날짜를 잡아 입원을 했고, 수술 전 검사를 진행하면서 내내 마음속앓이를 많이 했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빠의 모습이 마지막일까 두려웠다.
아빠 앞에서는 괜찮을 거라고 잘하고 오라고 웃으며 말했지만.. 너무 무섭고 겁이 났다.
시술이라곤 하지만 간단한 시술이 아니라서.. 5-6시간이 넘게 시간이 걸렸다.
일이 있어 친정오빠가 오지 못하고 내가 있기로 했는데, 아빠가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전화를 걸어 말하면서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듣더니 한걸음에 달려왔다.
처음 아빠가 아픈 걸 들었을 때 이외에 울지 않았고, 평소에 가족들 앞에선 잘 울질 않았기에 놀라서 달려온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이 났고, 2년 후 한 번의 시술을 더 하긴 했지만 마무리가 잘 되어 어떠한 후유증 없이 생활하고 계신다.
나중에 아빠에게 들은 얘기론 수술실로 들어가서 너무 무서웠는데,
운이 좋게도 수술실에 같이 들어간 선생님 중 한 분이 내 지인과 친분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oo 이에게 들었어요~ 친한 친구 아버님이라고 제가 들어가서 잘 될 수 있게 노력할 테니 편안히 받고 나오시면 돼요 “ 라며 이야기를 해주셨다고 한다.
아빠는 그게 그렇게 고마웠다고 지인분한테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다.
아마 그건, 아빠가 쌓은 덕이 아닐까 싶다.
아빠가 희생하고 노력하며 키운 내가 잘 자라서 그 덕을 본 거니까.
이제는 엄마가 없어서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가 우리 곁에 계셔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 하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됐다.
그러니까 아빠.
이제는 내가 아빠를 지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