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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Jul 29. 2023

울음에 대한 단상

아이의 울음을 보며

네 살 그리고 한 살,

요즘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되어주고 있는 아기 조카 둘.

그 둘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언어와 몸짓, 표정이 아닌 ‘울음’이 지닌 소통의 기능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언어의 사용이 비교적 수월해지는 일정 시기를 지나면, 사람은 흔히 슬플 때나, 고통스러울 때에 한정해서 울게 된다. 그러나 아직 언어 사용이 미숙한 아이에게 울음은 여러 종류의 자기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어른의 그것에 비해 훨씬 다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모든 능력의 향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 발가락을 입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아이의 신체 능력이 성장과정에서 점점 경직되어 가는 것처럼, 내면의 감정보다는 보호자에게 ‘내가 지금 어떤 이유로 불편하니 나를 돌보아 달라’는 메시지 전달의 목적이 강한 아이의 ‘울음’의 기능은 성장 과정에서 점점 퇴화해 버린다.


언어적 의사소통을 통해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나 자신뿐만이 아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과정이 ‘사회화’라 일컬어지는 발달 과정일 것이고, 어른들에게는 이 '언어'라는 것이 거의 만능 치트키처럼 역할하게 된다. 그에 반해, 아기의 울음이 갖는 기능은 한정적이고 일방적인데, 언어적 소통이 부재한 상황에서 우는 나 자신의 의사 표현만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울음’의 유래는 자기중심적인 데 있는 것 같다. 울음을 통해 타인, ‘보호자’로 일컬어지는 어른을 조종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른의 ‘울음’이라는 행동에도 자기중심적인 특성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슬픔과 고통의 외피를 쓴 울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언어로 정교화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의 표현이자 상대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원초적인 행위다. 홀로 우는 사람이 울음의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과정 역시 명료하지 않은 어떤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나 자신과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안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나의 울음을 통해 내가 슬픔을 혹은 아픔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가 울음을 통해 어른의 눈길과 손길을 얻어낸 것과 비슷한 정도의 안도 혹은 성취감을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근래 자주 아이의 울음을 접하면서, 어른이라 불리는 우리도 가끔은 적당히 울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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