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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댕굴이 Apr 26. 2022

TV 편성표와 함께 잊혀진 순간들

넷플릭스가 바꿔버린 나의 TV 시청 습관

이번 설에는 뭐 보지?


어릴 적 설이나 추석 연휴가 시작하는 첫날이면 평소 보지도 않던 신문을 펼쳐 형광펜을 잔뜩 칠해 놓곤 했다. 신문 뒷쪽의 TV 편성표를 보며 방송사별로 어떤 영화들을 명절 특선영화로 틀어주는지 확인하고 보고 싶은 영화가 시작하는 시간을 꼼꼼히 체크해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명절 때조차 TV 편성표를 펼쳐 보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특선영화 대신 원래 하던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커졌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영화를 언제든 원하는 때에 바로 켜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와 똑같은 이유로 뉴욕타임스는 2020년 8월 30일을 끝으로 81년 만에 TV 편성표를 아예 지면에 싣지 않기로 결정했다. TV 편성표 자리에는 문화면을 대신 넣는다고 한다.

"지금은 명백히 스트리밍의 시대다.
 TV 편성표는 더 이상 사람들이 TV룰 소비하는 방식을 대변하지 못한다”
                                                - 길버트 크루즈 뉴욕타임스 문화부장


스마트폰의 등장, 스트리밍 시대의 도래, 다양한 OTT 콘텐츠들의 범람. 기술의 발전을 비롯한 여러 변화들이 맞물리며 대중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이 변화했다. 언제 어디서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현재에 익숙해지면서 나의 TV 시청 습관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사라진 TV 편성표를 보며 지금은 잊혀진 순간들을 떠올린다.




요즘 TV를 보는 내 모습은 이렇다.

리모컨 2개를 손에 쥐고 지상파와 케이블 채널을 한 번 쭉 훑는다.
'볼 게 없네'하며 다른 리모컨으로 넷플릭스나 유튜브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전에 보던 영상이나 그것과 '비슷한 콘텐츠'나 '추천 영상' 중에 아무거나 골라본다.
초반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영상으로 넘기고 넘기고를 반복한다.
그러다 결국 아무거나 틀어놓고 휴대폰을 한다. 결국 열심히 고른 영상은 BGM이 된다.


글로 적고 나니 더더욱 예전과는 시청 습관이 극명하게 달라졌음을 체감한다.


1. '보고 싶은 것'이 사라졌다.

TV 편성표가 존재하던 시절엔 좋아하는 만화나 드라마가 무슨 요일 몇 시에 어떤 채널에서 하는지를 꿰고 있었다. 보고 싶은 것이 명확했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본방사수'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학창 시절 가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때를 꼽으라면 드라마 시작 30분 전것이다. 본방 시작 전까지 모든 것을 끝내야 했으니 초인적인 집중력이 발휘될 수밖에.

하지만 이제는 딱히 보고 싶은 것이 없어도 '볼 게 뭐가 있는지'를 보기 위해 TV를 켠다. 일단 TV를 켠 후, 즐비한 영상들 중 끌리는 것을 하나 고르는 것이다. 때문에 무엇을 보고 싶은지 명확지 않아도 괜찮아져 버렸다.


2. '우연한 만남'도 사라졌다.

방송 시간을 미리 확인해둔다 한들 아주 정확히 시작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채널의 방송을 보면서 기다렸다. 덕분에 '60분'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내 취향이 아닌 프로그램들도 드라마 시작 전 기다림을 채우기 위해 종종 보게 됐었다. 그러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고 방송에 빠져들어 정작 보려고 했던 드라마를 놓친 적도 있다.

하지만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OTT 서비스에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영상을 볼 필요가 없다. 내 취향의 것들이 우선 보여지며, 그중에 내가 선택한 것만 재생이 된다. 더 이상 지나가다 흥미를 느껴 머물게 되는 우연은 발생할 여지가 없다. 내 취향이 아닌 것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신선한 충격도 사라져 간다.


3. '다양한 자극'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OTT 플랫폼에서는 저마다의 새로운 콘텐츠들이 생겨나고 있다. 즐길거리가 풍성해졌으니 그저 즐거울 줄만 알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 수많은 선택지가 주는 피로감이 만만치 않다. 구독자들의 피로감을 눈치챘는지 넷플릭스에서는 랜덤재생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서도 다음 영상을 클릭하지 않아도 추천 영상을 자동재생해준다. '추천 알고리즘'의 정확도는 OTT 서비스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척도가 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향유할 수 있는 콘텐츠의 절대적인 양은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많아진 반면, '내가 시청하는 콘텐츠' 자체는 오히려 폭이 좁아졌다. 내가 선택한 것, 내가 선택했던 것과 비슷한 것, 내 취향으로 분석된 것들로 둘러싸인 것이다. 다양한 듯 다양하지 않은 다양한 것 같은 콘텐츠의 향연이다.




인기 해외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 P2P 사이트를 들락 거리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검색부터 시청, 다음 볼거리 추천까지 클릭 한 번이면 가능한 시대가 왔다. 예전에 비해 편리해진 것은 분명한데, 뭔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때의 나는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매 순간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같다. 때로는 기대했던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재미 없어서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본 프로그램에서 예상 외의 웃음이 터지기 했다. 계획하지 않고 찾아왔던 뜻밖의 것들이 나의 취향과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디지털 세상이 가져온 수많은 정보 편리은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라져가는 것들 또한 그저 놓아버리 참 아쉽. 디지털의 이점을 온전히 유하면서도 아날로그 시대에 누렸던 간절한 몰입이나 의외성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내가 무엇을 보고 싶은지'부터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TV 편성표에 형광펜을 칠하던 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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