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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댕굴이 Jun 24. 2022

디지털 포토북과 필름카메라의 공통점

기록의 홍수에서 추억을 지켜라

엄마와 나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영화배우의 이름이 있다.  


이십여 년 전쯤이었다. 티비 생중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던 늦은 밤, "저 배우 이름이 뭐더라?"

가볍게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시상식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입 안을 맴도는 배우의 이름을 곱씹으며 괴로워하다가 다음날 아침밥을 먹을 때에야 엄마가 '아휴 드디어 기억났네'를 외치고 상황 종결됐다.


당시 나이를 생각해 보면 스마트폰은 없어도 인터넷은 급되었을 때였을 텐데, 아마 한밤중에 PC를 켜는 수고로움 대신 직접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몇 시간을 끙끙댔던 덕분인지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배우의 이름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때의 기억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온간데없이 사라지고, 요새는 무언가 생각나지 않으면 10초만 지나도 답답해서 검색창을 열고 만다. 검색 한 번이면 손쉽게 궁금증이 해결되니, 알아냈던 정보도 금세 잊어버리고 재차 찾 일쑤다.


무언가를 기억해야 할 때면 암기는 커녕 필기조차 하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버리면 쉬우니까.

인터넷에서 유용한 정보를 보면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캡처를 해둔다. 캡처는 쌓여가는데 정작 내용을 읽겠다고 다짐한 것조차 까먹어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뭐든 사진 찰칵 한 방으로 해결해 버리려고 해서일까?

휴대폰 속 갤러리는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온갖 물건을 급하게
밀어 넣은 잡동사니 창고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든, 우연히 본 이미지든, 길거리에서 본 꽃이든 검색 키워드를 몰라도 스마트폰만 들이대면 AI가 궁금증을 손쉽게 해결해 주는 요즘 세상에도 검색할 수 없는 정보가 있다. 개인의 추억.


이십여 년 전 학창시절 때만 해도 백업에 대한 개념없다시피 했고 클라우드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만약 싸이월드가 데이터 복원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의 한 챕터를 깡그리 잃어버릴 뻔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예전에 가꾸었던 나만의 '미니 홈'을 되찾고 나서야 생각했다.

스마트폰 때문에 기억력은 나빠졌을지언정 추억만큼은 제대로 보관해야겠다고.



그렇게 포토북 작업을 시작했다. 제공되는 템플릿에 사진만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힘든 작업이었다.

잡동사니 가득한 창고 안에서 보물을 솎아 내듯,  한 장만 건지자며 심코 눌러댔던 셔터 수만큼 쌓여 있는 수십, 수백 장의 사진들 속에서 최고의 한 컷을 골라내는 작업은 여간 고단한 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진 중에 포토북에 옮길 단 하나의 베스트 컷을 고르는 작업은 필름 카메라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적 앨범을 보면 눈에서 빨간 레이저가 나오는 사진,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는 사진, 손으로 머리를 넘기고 있거나 눈을 희번덕 뜬 사진까지도 앨범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이 마음에 들 때까지 무제한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지금과 달리, 하나의 필름으로 찍을 수 있는 사진의 개수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미적 관점과 별개로 한 장 한 장이 소중했다.


그때는 필름의 제약 탓에 추억을 남기는 것 자체가 희소했던 대신 그 추억은 희소성만큼이나 오래 기억에 남았다.

주어진 포토북 장표에 맞추기 위해 갤러리를 뒤적이는 작업 사진 찍을 때냐, 찍고 난 냐만 다를 뿐 '소중한 순간을 선별해낸다'는 점에서 필름 카메라와 같았다.




지금은 정보의 홍수 시대답게 지털 세상 어디에나 나를 손쉽게 기록할 수 있다. 반면, 보고 싶은 추억을 돌아보는 것은 길고 긴 스크롤을 내리는 일처럼 꽤나 번거로워졌다.

기록의 홍수가 추억을 희석시키는 듯하다.


포토북을 만들면서 희석됐던 추억들이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포토북 만들기의 고됨을 알게 된 이후로, 그날 찍은 사진은 최소한만 남기고 불필요한 건 바로 삭제해버리는 '필터링' 습관이 생겼다.


쉽게 찍히는 사진만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쉽게 만들어지고 삽시간에 확산되는 요즘다.

잡동사니 창고처럼 쌓여가는 갤러리 속 사진들처럼 인터넷상의 수많은 정보들도 필터링 없이 배출되고만 있다.


소중한 사진을 선별하기 위해 포토북에  노력만큼이나

가치 있는 정보를 판별해내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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