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방울 산책

by 겨울빛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은 비 온날의 산책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중에 하는 산책은 별로다. 비가 올때 걸으면 아무리 무장해도 결국 옷이나 피부에 물이 묻게 되고, 그러면 옷이 달라붙어서 썩 기분이 좋지 않거나 자칫 체온을 빼앗겨서 감기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비가 올 때 산책하면 우산도 써야하는데 이 또한 거추장스럽다. 비가 올때는 어쩔 수 없이 이동해야 할 때 아니면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 때 걷는 건 나에게 이동이지 산책이라고 보긴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은 비가 다 내린 지 얼마 안된 후 하는 찰나의 산책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다 그친 것을 확인한 뒤 방수가 되는 옷이나 우비를 입고 재빠르게 나간다.


비가 그친 지 얼마 안된 후 밖에 나가보면 공기에 미세한 물방울들이 마치 내려가다 땅에 닿기 싫어 잠시 멈춘 것처럼 방울방울 공기 중에 머물러 있다. 물이 직접 닿으면 축축하지만 이 물방울들이 피부를 스치는 것은 마치 사우나의 증기를 차가운 방식으로 바꾼 것처럼 상쾌하다. 비가 내리기 전 더웠던 대기가 시원하게 식혀져 걷는 동안 두 뺨을 스쳐지나 가는 것이 느껴진다. 대기 중에 물방울들이 머물러 있어 마치 옛날 사진에 노이즈가 낀 것처럼 살짝 뿌옇게 보여 몽환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방울방울 산책의 목적은 냄새에 있다. 공기 가득한 작은 방울들을 있는 힘껏 큰 숨으로 들이 마시면 나무향이 뭍은 물방울들이 코로 들어오고, 이내 마음이 망울망울해지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코로 느껴지는 향이 다른 것도 황홀한 부분이다. 평소 보다 존재감을 내뿜는 물 묻은 흙의 냄새, 상쾌한 솔잎 향은 물내음이 함께 더해져 더욱 맑은 향을 내뿜는다. 또 한 걸음 걸으면 이번엔 풀 향이 흙 내음과 함께 올라온다. 다음에 들이 마실때는 어떤 향이 날까 기대하며 걷게 한다.


같은 길을 걸어도 맡을 수 없었던 향들이 비오고 난 뒤에는 축제처럼 반긴다. 물방울을 전령삼아 마치 나무들이, 흙이, 풀들이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알리는 것 같다.


보통 비가 오는 날에는 산책로에 사람이 많지 않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산책해야 하는 몇몇 견주들 외에는 평소보다 고요하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나면 마치 소리마저 물방울에 갇힌 것처럼 특히 더 고요하게 느껴진다. 작은 빗방울들로 가득찬 조금은 뿌연 시야는 마치 숲의 정령들이 인간 대신 공간을 차지한 듯이 느껴져 손님이 된 마음으로 조심조심 걷게 된다.


걸음걸음 달라지는 숲 내음이 폐에 가득찰 때마다 내 마음에도 행복한 방울들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나는 이 몽글몽글한 산책을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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