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 다음으로 다룰 곳은 집에서 제일 큰 공간이다. 지금 우리에게 집에서 제일 큰 면적을 차지하는 공간은 거실일 것이다. 그러나 한옥에서 주방은 집에서 제일 큰 공간이었다. 주방은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기능에 걸맞게 문도 많았고 문의 종류도 다양했다. 마당으로 난 문은 양문의 여닫이가 달려 있고 이것과 똑같이 생긴 문이 맞은편에 붙어 있어 뒷마당으로 통하게 했다. 그리고 부뚜막 위로 작은 쪽문을 내어 안방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주방이 변화에 밀려 사라지면서 여기에 있던 여러 기능들도 함께 사라진 듯하다. 우리 것으로 존재하던 주방에서 스토리와 재미를 찾아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다. 과거 집이 만들어져 우리가 불을 사용한 곳도 주방이고 좌식문화를 가지고 있는 한옥에서 입식으로 되어 있는 곳도 주방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옥의 주방을 특별하게 보는 데는 이곳이 가진 모양 때문이다. 한옥에서 방은 거실과 같이 바닥에서 볼록하게 위로 올라온 공간이지만 주방은 집에서 움푹 파인 오목한 공간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마당을 위에서 내려다보게 되지만 이곳에서는 마당을 지표면의 높이로 바라볼 수가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다른 곳에서는 빗줄기가 일정하게 한방향으로 떨어지지만 이곳 주방에서는 마당과 부딪혀 개구리 같이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마치 속이 오목하게 파인 배에 앉아 수면 위에 고요히 떠 있는 세상을 대하는 듯한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장작이 타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 아궁이는 운치를 더하며 바깥 세상의 여운을 달래 준다. 이것은 오목한 것이어서 얻을 수 있는 감성이고 오목한 것이어서 깊어진 차분함이다.
#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옥 주방의 오목한 공간을 다시 우리의 거실로 가져와도 좋을 것 같다. @브라질 EG 하우스 by 플레이 아키텍처 2022, 스페인 포블레누 중심부 아파트 by m-i-r-a 아키텍처2020, 이스라엘 슈메를링 스트릿 하우스 by 뮐바우어 아키텍처2018 (EG House by Play Arquitetura, Apartment in the Heart of Poblenou by m-i-r-a architecture, The House of Shmerling St. by Muhlbauer Architects)
내가 주방을 평범하게 기억하지 않는 데는 한가지 사건 때문이다. 나와 친구들이 어릴 적 크게 사고를 친 곳이 주방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주방에서 놀기도 했는데 한옥의 주방은 불놀이를 하고 놀기에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친구는 동네에서 제일 큰 한옥집에 살았는데 우리는 그날 그곳에 모여 놀다 사고를 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불이 집을 통째로 태우면서 그곳에 양옥집이 새로 지어졌다. 그래서 동네에 양옥집이 처음 지어지게 된 것도 우리가 불장난을 했던 주방과도 연관이 있다. 하지만 새로 지은 양옥집의 주방은 예전의 집과는 많이 달랐다. 예전에는 마당으로 붙은 문이 주출입구였다면 양옥집은 입구가 거실 쪽으로 바뀌었다. 바깥으로도 통하는 문이 있긴 했지만 예전같이 집의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돌아 들어가는 구조였다. 예전에는 오목했던 주방이 높게 바뀌면서 입구에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새로 생겨났다. 그러면서 예전의 크고 많았던 문들도 적어지고 이 마저도 작아져 버렸다.
내가 한옥의 주방을 좋아하는 데는 이것의 크기도 한몫 한다. 나는 집에 주방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도 문이 크게 붙어 있는 것도 좋다. 이것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외국을 다니다 보면 그곳의 작은 주방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중국에서 생활할 때는 주방이 작아 불편함이 많았다. 30평대의 최신식 아파트였지만 주방이 집에서 제일 작아 중국의 크고 화려한 음식과는 비교될 정도였다. 유럽의 주방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오래된 궁전이나 대저택을 답사해 보면 이곳의 주방 역시 작고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의 성대한 연회가 이 작은 곳에서 준비된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옥의 주방은 크고 지금의 거실과도 닮은 데가 없지 않다. 이때문인지 거실 한쪽에 장작을 쌓아 놓거나 장에다 아름다운 그릇을 보기 좋게 진열해 놓은 것을 보면 가슴이 뛰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 별도의 공간을 가지고 있던 한옥의 주방은 지금의 거실에서 닮은 곳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호주 멕릭스 팜하우스 by 마이클 럼비 아키텍처 + 닐슨 젠킨스 2021 (Merricks Farmhouse by Michael Lumby Architecture + Nielsen Jenkins)
한옥은 주방이 오목하게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공간들이 선물처럼 생겨 날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공간이 없었다면 한옥의 집과 방은 지루한 육면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방이 오목해지면서 여러가지들이 이곳에 볼록하게 달릴 수 있었고 이것이 집을 변화시켰다. 높아진 천장에는 다락방이 위로 매달렸고, 안방과 붙은 벽에는 거실장이 나와 앉을 수 있었다. 한옥의 주방과 같이 우리의 집에도 이런 오목한 공간이 함께 존재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하나의 정해진 방식으로 집을 대하는 것이 아닌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변화된 공간이 함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집의 한곳 정도는 다른 곳에 공간을 내주면서 생겨나는 볼록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양보하며 만들어지는 공간은 분명 집에서 감탄과 함께 다름을 만들어 낼 것이다.
# 공간은 어쩌면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닌 비어주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배려가 양보를 만들어 내듯 이렇게 생겨나는 공간은 분명 다르고 호감이 느껴진다. @프랑스 라이프폴 르그랑 보건소 by 스튜디오 라다 2021, 미국 레지던스 인 프린스 by 마블 아키텍처 2018, 스위스 클라인스 하우스 by 루카스 렌허르 아키텍처 2019 (Health Municipal Clinic in Liffol-Le-Grand by Studiolada, Residencias en Prince by Marvel Architects, Kleines House by Lukas Lenherr Architekt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