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릴때면 사람들마다 시작하는 곳이 다르다. 누구든 큰 틀을 그리고 나면 자신이 좋아하는 곳부터 그림을 그려 나간다. 눈을 먼저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를 먼저 그리는 사람 있고 머리나 귀를 먼저 그리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눈을 먼저 그린다. 이렇게 하면 머리의 중심에 눈이 위치해 있어 비례를 잡기가 쉽고 비스듬히 있을 경우 투시를 잡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을 제일 먼저 시작한 곳이 또 제일 먼저 완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 있으니 그만큼 많이 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친구는 항상 코를 먼저 그렸다. 그것도 코를 다 완성시키고 나서 다른 곳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친구는 그림을 잘 그렸다. 친구가 그렇게 하는 데는 이유도 명확했다. 코가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친구가 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가 코를 먼저 그린 것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집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친구가 하던 대로 집 앞에 놓인 계단을 집의 시작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계단이 객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무대처럼 보였다.
나는 계단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내가 인상 깊게 본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의 구성은 과감하며 파격적이다. 이 그림은 나를 설레게 한다. 명작 중 계단이 그림의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그 계단 위에 누운 듯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모습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라면 이렇게 앉아 있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이 모습이 알렉산드로스 왕에게 햇볕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 말하며 취하는 자세 같이 느껴진다. 계단은 이렇게 대담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계단이 편안함을 품기도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스페인 계단에서는 모두가 이곳에 걸터앉아 시간을 즐긴다. 여기에 젤라또가 더해지면서 계단은 달콤함과 아름다움이 머무는 공간으로 변신한다. 과연 건축에서 한가지 요소만 가지고도 계단만큼 주목을 받고 사랑받는 것이 또 있을까? 그리고 계단 말고 한가지만 가지고도 건축이 되는 게 또 있을까?
# 집 앞에 놓인 계단은 대담하면서도 편안한 공간이다. 계단은 집에 자신감을 주고 우리를 쉬게 한다. @스페인 오데나 광장 리노베이션 by SCOB 아키텍쳐 & 스페이스 2019 (Plaza Mayor de Odena Renovation by SCOB Arquitectura y paisaje)
계단을 집 앞쪽으로 당겨 내면 무대가 되고 마중의 공간이 된다. 집에서 어머니가 나와 가족을 기다리는 공간이 되고, 호텔에서 손님을 맨 처음 맞이하는 곳이 된다. 계단을 마루나 문 앞에 갖다 놓으면 집으로 들어가는 디딤돌이 된다. 계단이 집의 안과 밖을 가르는 관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계단은 집에서 변신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옥에 2층이 없는 것과 우리의 다락방이 숨겨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공간을 평범함이 아닌 비밀의 공간으로 대하면 좋을 것 같다. 마치 궁전에서 좁고 휘어진 계단을 통해 비밀의 침실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계단을 제 3의 공간과 연결되는 마법의 통로로 만들어야 한다. 그냥 시시하게 오르내리는 불편한 길이 아닌 계단을 소중한 우리의 발걸음이 시작되는 첫번째 관문으로 대해야 한다. 우리는 계단을 집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특별하게 꾸밀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오페라 하우스나 연회장을 내려오며 도도함을 뽐낼 수 있는 그런 곳이면 좋겠다.
# 계단은 집과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하루에도 몇번씩 오르내리는 이곳을 우리는 우아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한다. @미국 프린스 레지던스 by 마블 아키텍쳐 2018, 중국 4필러 파빌리온 by 파운드 프로젝트 + 슈나이더 & 루셔 2022, 싱가포르 세렌디피티 하우스 by 월플라워 아키텍쳐 + 디자인 2022 (The Residences at Prince by Marvel Architects, Four-Roof Pavilion by Found Projects + Schneider & Luescher, Serendipity House by Wallflower Architecture + Design)
[창, 나의 표정]
창은 억울할 것 같다. 이것은 창이 다양하게 쓰이면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본래의 역할까지 바뀐 것 같아서다. 창은 원래 한가지 목적으로 태어났다. 단어 그대로 바깥을 보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다. 보통은 베이 윈도우나 프렌치 윈도우 같이 창의 생긴 모양으로 이름이 불렸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가 있듯 태양을 볼 수 있게 지붕에다 창을 내면 선루프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창은 집 어디에 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창보다 창문이 더 익숙하다. 그만큼 우리는 창을 문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꾸 창에 문을 달아 열거나 문의 용도로 그곳으로 다니려 한다. 창이 기능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창을 모두 창문으로 바꾸기 보다 본래대로 창을 함께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창문보다 창일 때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집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은 집의 표정을 만들어 낸다. 집을 통채로 창으로 지을수도 있고 반대로 집에 창을 넣지 않을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집의 표정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하이테크나 퓨처리스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집은 집이 각각의 표정을 갖는 것이다. 현관의 창은 길죽하게 서있어 바깥의 모습을 길게 담을 수 있고, 거실의 창은 넓직하게 앉아있어 한폭의 자연을 담을 수 있고, 침실의 창은 편안하게 누워 있어 파란 하늘을 골라 담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창이 나의 취향과 바깥의 모양을 반반씩
예쁘게 담으면 좋을 것 같다. 창의 모양 또한 넓게 볼 수 있는 사각형도 있고, 나무 사이를 볼 수 있는 길쭉한 모양도 있고, 지붕을 볼 수 있는 삼각형도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바깥을 오려서 볼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창도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 창이 창문으로 바뀌면서 집이 사각의 무뚝뚝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창이 집과 우리를 더 많이 웃게 하면 좋을 것 같다. @캐나다 레인지 라이프 하우스 by RELM 빌더 + 플롯논플롯 아키텍쳐 2023, 벨기에 빌라 ABC by 오브젝트 아키텍쳐2023, 영국 라미드 어스 스튜디오 by 인비저블 스튜디오 (Range Life Home by RELM Builders + Plotnonplot Architecture, Villa ABC by Objekt Architecten, Rammed Earth Yoga Studio by Invisible Studio)
창이 꼭 바깥의 경치를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창에다 우리의 상상력을 더하면 집에 재미있는 공간이 생겨나고 공간에도 표정이 생긴다. 이 창을 통해 우리가 꿈을 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집이 내가 꿈꾸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그림속에 존재하는 예쁜 공간으로 바뀌기도 한다. 창을 실내로 옮겨 놓으면 창이 거울이 되어 나를 바라보게 할 수도 있고 나의 취미를 창을 통해 바라보고 즐길 수도 있다. 이처럼 창이 우리를 더 많이 꿈꾸게 하면 좋을 것 같다.
# 창의 모양과 위치 그리고 방식이 집을 새롭게 바꾼다. 그리고 이런 창은 우리를 상상하게 한다. @미러 매이즈 어파트먼트 by 야엘 페리 인테리어 디자이너 2021, 에스토니아 패밀리 앤 바이크 하우스 by AZIA 아키텍쳐 2021, 브라질 올라리아 하우스 by NJ+ 아키텍쳐 2021 (Mirror Maze Apartment by Yael Perry | Interior Designer, House for a Family and Bikes by AZIA Arhitektid, Olaria House by NJ+ Arquitetos Associados)
[문, 생활을 넘어 풍류로]
우리의 문은 오히려 퇴화를 한 듯하다. 한옥에 많았던 미닫이문도 양문형 문도 현대 주택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문을 열어 처마에 매다는 들어열개문(문짝 전체를 걸쇠에 들어 걸게 만든 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창과 비교해 보면 문에는 좀 더 많은 역할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문의 크기와 모양을 다르게 할수도 있고 색을 다르게 칠 할수도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것으로 문이 홀로 집에 머무는 것이 아닌 주변과 어울리며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문이 벽이되게도 할수도 있고 열렸을 때는 문이 사라지게도 할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가 문에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집에 대해 더 많은 결정권과 사용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문을 어떻게 열것인가는 중요하다. 현관문을 양문으로 열리게 할 것인지, 이것을 당겨서 열고 들어갈 것인지가 집에 재미가 더한다. 집에 있는 많은 문들을 한가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열리게 한다면 집이 더 재미있어 질것이다. 만약 미닫이로 바꾸어 문을 숨길 수 있다면 집에서 새로운 변신을 만들어 낼수도 있다. 그리고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문을 선물할 수도 있다. 집은 계획 단계에 중요한 동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것을 바꾸어 놓는 것이 문이다. 문이 삼각형이나 동그라미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든 문을 한 개의 규격으로 정하거나 동선을 하나로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 우리가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필수라고 해서 우리가 정해진 고정 관념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맥시코 파칼 하우스 by 디세뇨이 컨스트럭션 2022, 호주 핫탑피크 하우스 by FIGR 아키텍쳐 & 디자인 2021, 이태리 아리스토 하우스 by 톰 티스 아키텍쳐 2020 (Pakaal House by Workshop, Diseño y Construcción, Hot Top Peak House by FIGR Architecture & Design, Aristo House by Tom Thys architecten)
그리고 바깥으로 통하는 문은 좀 더 특별하면 좋겠다. 지금보다 좀 더 실험적인 문이 집에 많아졌으면 한다.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던 전통의 다양한 문들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우리의 집이 생활을 넘어 풍류를 즐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서 우리에 맞는 사용성을 새롭게 더하면서 과거와 같은 거대함과 소박함을 골고루 갖출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대문은 부엌과 헛간을 묶어 하나의 루트를 만들어 사용했고 방에는 미닫이와 여닫이문을 같이 달아 공간을 구분하고 동선을 바꾸며 사용했다. 그때의 문이 같은 것은 한데 모으고 다름을 구분한 것처럼 우리도 문에다 배역을 주고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문은 열고 닫음을 넘어 문이 열린 상태로도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다.
# 문이 벽의 경계를 없애는 것처럼 문이 열린 상태에서도 집은 아름다워야 한다. @룩셈부르크 도메인 클로드 벤츠 by 질 벤츠 스튜디오 2022, 중국 트리 하우스 by ST 디자인 스튜디오, 포르투갈 팔헤이로 하우스 by 페드로 헨리케 아키텍쳐 2022 (Domaine Claude Bentz by Studio Jil Bentz, Tree House by ST Design Studio, Palheiro House by Pedro Henrique Arquite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