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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Apr 17. 2024

여행의 이유

짧은 여행도 이제는 좋다

여행을 다녀왔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계속 쌓여만 갔던 마음속의 먼지를 조금은 털어낸 것만 같다. 전주로 가서 특별히 한 것은 없다. 그저 먹고 마셨을 뿐. 여행은 같이 간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이번 여행은 먹고 마시는 게 잘 맞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그러니 먹고 마신다는 건 우리 여행의 최대 목적이었기도 하다.


오전 10시 반, 비가 내리는 전주역에 도착한 우리는 역 근처의 백반집에서 첫끼를 시작했다. 만 원짜리 백반과 맥주 그리고 소주. 반찬들이 대부분 간간해서 안주가 되었다. 요즘 서울에서는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순대국밥 한 그릇 정도 사 먹을 수 있다. 최근 2~3년 안에 한 끼 식사비가 많이 뛰어올랐다. 당연하다. 식재료비는 그 이상으로 올랐다. 식당에 손님이 없을 때 들어간 우리는 점심식사 손님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하자 일어섰다. 반찬을 조금 더 청해 소주 한 병을 더 마시고 싶었지만 본격적으로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빨리 일어나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됐다.


한옥마을 한 복판에 있는 숙소에 짐을 놓고 나와 '경기전'을 걸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니 조선 역사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은 인정하겠으나 죽은 사람의 초상화 하나 걸어두고 제사를 지내자고 궁을 이렇게나 크게 지을 일인가 싶어 마음이 괜히 삐뚤어진다. 어쨌든 경기전 내부의 풍경과 아기자기한 건물은 충분히 좋았다. 경기전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전동성당을 둘러봤다.

조선왕조 최초의 순교자가 박해를 받은 곳에 세운 전동성당은 그 위치 자체가 큰 의미이다. 성당을 이곳에 세우기로 한 신부의 꼼꼼함이 엿보인다. 박해지에 땅을 마련하고 그곳에 건축물을 세우는 게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한 계획이었을까? 게다가 천주교를 박해한 조선왕조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상징이라니. 아마도 후대에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박해와 저항정신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도록 계획한 것!

반대로 생각하면 조선의 유교를 최대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정동성당이 보기 싫고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다.


경기전 어디에서도 전동성당이 보인다


중정이 있는 한옥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숙소에 와서 잠시 쉬었다. 오전부터 한잔씩들 해서 그런지 하나, 둘 눕기 시작하더니 모두 잠이 들었다. 나는 툇마루에 앉아 책을 읽었다. 임경선의 '호텔이야기'. 단편소설집은 호흡이 간결해 여행할 때 가볍게 읽기 괜찮다. 괜히 짐만 되는 건 아닌가 했는데 기차 안에서 읽던 소설은 어느덧 반을 넘기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자고 나면 일어날 줄 알았던 일행들이 잠에서 깨지 않아 혼자 밖으로 나왔다. 저녁에 가보려 했던 곳을 먼저 둘러보기 위해서다. 나는 그런 걸 즐긴다. 나도 초행이지만 조금 먼저 둘러보고 일행을 안내하는 것. 저녁이 가까워지자 한옥마을은 사람들이 빠지고 조용해졌다. 건물이 낮고 골목이 좁았다. 걸을 맛이 났다.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돌아오니 일행들이 모두 일어나 있었다. 얼굴들이 한층 개운하다. 저녁을 먹으려고 미리 계획해 두었던 물갈비를 먹고 가맥집으로 넘어가 맥주를 마셨다.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일행이 바로 옆에 LP바가 있다고 해서 자리를 옮겼다. 머리가 희긋한 노신사분이 베스트까지 맞춰 입은 정장을 하고 우리를 맞이했다. 둥근 원탁에 앉으려고 했다가 바로 옆에 가맥집에서 봤던 연인들이 있어 바자리에 다섯 명이 나란히 앉았다. 가맥집에서 봤던 연인은 그 시끄러운 곳에서 더 시끄럽게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다섯 명이 일렬로 앉으니 모두 함께 대화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음악을 듣기에는 더 좋았다. 우리는 서로의 신청곡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췄다. 블랙러시안과 진토닉을 조금씩 홀짝거리며.

분위기 있던 LP bar

다음날, 모두 숙취가 조금씩 있었다. 콩나물해장국을 먹기에 딱 좋은 상태였다. 짐을 싸서 나와 남부시장으로 걸어갔다. 말 한마디 없이 아오, 아이고 소리만 주고받으며 해장국을 먹고 나니 몸이 나른해졌다. 개천을 가로질러 있는 청연루에 가서 일렬로 누웠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슬슬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추워졌다.

저녁 7시에 예매해 두었던 기차표를 2시 반으로 앞당겼다. 모두들 동의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오는 기차에서 모두 꾸벅꾸벅 졸았다. 아직은 숙취들이 남아있었다.

용산역에 도착한 우리는 마지막으로 밥을 한 끼 더 하기로 했다. 전주역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는데 막상 용산역에 도착하니 맘이 달라졌다. 오는 동안 피로가 조금 풀린 것이다.


빌딩숲을 함께 걸었다. 다시 서울이다. 1박 2일도 꼴에 여행이라고 제법 오랜만인 것 같다. 조금 쉰 것 같다. 아니 확실히 쉰 것 같다. 너무 짧은 여행은 여행같지가 않아 아예 떠나지 않으려 했었다. 감질맛만 느낄 바엔 아예 맛도 안 보는 게 좋으니까.


이제는 조금 바뀌었다. 감질맛으로도 깊게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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