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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명찬 Apr 26. 2024

아버지의 걸음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버지가 걷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다녀왔다. 엄마의 무릎 수술 후 가족들이 함께 간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 역시 병원에 3개월 정도 입원해 있었으니 실제로 아버지를 만난 건 4개월 만이다.

아버지는 안동에 있는 '복주회복병원'에 입원해 있다. 서울에 있는 많은 병원을 두고 복주병원에 모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년 전 낙상 사고로 인해 경희대 중환자실에서 한 달 동안 입원해 있던 아버지는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 자체가 되지 않을 때라 우리 가족은 한 달 내내 새벽에 전화만 울려도 손을 벌벌 떨며 전화를 받았다. 의식이 호전돼서 한 달만에 일반실로 옮겼을 때도 아버지는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눈만 깜빡거렸다. 그때 우리 가족은 앞으로의 일보다는 중환자실에서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었다.


일반실로 오고 나니 병원에서는 재활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곧 환자를 옮겨야 한다고 얘기했다. 한 시름 놓고 나니 다시 고민의 시작이었다. 재활병원이 뭔지, 요양병원이 뭔지.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그때 마침 재활병원에서 잠시 근무를 하고 있었던 처형이 없었다면 나는 아버지를 지금처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어느 정도 체념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있었던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죽음을 생각하다 보니 마음속에서 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것 같다.


손가락, 발가락도 잘 움직이지 못하고 눈에 초점도 희미한 아버지를 마주 하며 나는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까운 요양병원에 모셔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가친척들이 면회를 하며 마지막을 천천히 준비하는 일이 아버지를 대한 나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처형이 나에게 안동복주병원을 소개해주었다. 병원장의 인터뷰와 재활프로그램이 담겨 있는 유튜브 영상을 링크로 보내주었는데 나는 하루동안 그 링크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처형이어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참견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게 싫었다. 게다가 서울도 아니고 안동에 있는 병원이라니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 잠을 한숨도 못 자고 혼자 거실로 나와 앉아 있다가 처형이 보내준 영상을 그제야 보았다.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잘 알아보지도 않고 혼자만의 판단으로 아버지를 포기하고 있었다. 관련 영상을 모두 찾아보니 아침이 오고 있었다. 컴컴했던 거실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가족회의를 하기 전 처형이 그랬듯이 영상 링크를 보내주었다. 가족회의를 하기 전에 영상을 보고 오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결심을 하고 나니 아버지가 안동까지 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형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을 토대로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가까이 있는 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쨌든 무조건 환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해. 뇌출혈은 발병 후에 3개월이 진짜 중요한데 그때 어떻게 뇌에 자극을 시키며 재활을 시키느냐에 따라서 환자의 미래가 정말 달라져. 친척들이 면회를 못 오고 이런 거 절대 신경 쓰지 마. 고모들이 왜 이렇게 먼데 모셨냐고 난리를 쳐도 나는 오로지 우리 가족만 생각할 거야. 엄마도 고모들 말에 흔들리지 마. 나는 무조건 아버지 일으킬 거야. 일으킬 수 있어.

어차피 지금 코로나라서 매일같이 면회도 되지 않아. 그러니 안동에 계시던 서울에 계시던 매일 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야. 안동까지 왔다 갔다 하는 거 물론 힘들겠지. 그런데 아버지만 좋아진다면 그게 무슨 문제겠어.

일단은 아버지 입장에서만 생각하자. 그리고 좋아지시면 서울로 옮기면 되지. 그게 최선이야.


사실 말이 가족회의였지. 통보였다. 만약 엄마와 동생이 반대를 했었어도 나는 그대로 했을 것이다. 물론 가족들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원팀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날은 2023년 4월 29일 토요일.


안동복주병원에 온 지도 1년이 다 돼간다. 1년 동안 우리는 안동을 오갔고 아버지는 이제 우리를 보면 첫눈에 알아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이름을 불러준다.

1년 전, 아버지를 생각하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직 인지능력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 정상적이 대화가 길게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이 또한 좋아질 것이라 믿고 있다. 물론 환자가 회복될 수 있는 선은 분명히 존재한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년 동안 우리 가족은 계속 좋아질 것이란 믿음 하나로 버티고 있다.


어제는 아버지의 재활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재활치료실에 보호자들은 참관조차 하지 못했다. 재활치료사 선생님들이 종종 보내주시는 치료 영상을 보며 감격을 하곤 했는데 아버지의 재활을 직접 보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누워서 눈만 껌뻑거리던 아버지가 혼자 휠체어에서 내리고 혼자 신발을 신고 벗었다. 요플레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으며 불안하지만 아장아장 혼자 걷기도 했다.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아버지의 걸음마를 보며 그 예전, 아버지가 청년의 시절 나의 걸음마를 곁에서 지켜보았을 그를 상상한다. 그는 생명의 희망을 보았을 것이고 나는 생명의 고귀함과 마주한다.


복주병원의 모든 분들이 친근한 인사를 건넨다. 나 역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한다. 1년 전 아버지를 처음 병원에 모시고 왔을 때 서류 수속을 마치고 멍하니 있는데 보행기에 의지하고 병원 복도를 걷고 있던 환자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저 정도로만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병원의 간호사와 그 환자가 지나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농구 경기에서 한 골을 넣고 코트로 돌아온 동료 선수에게 파이팅을 불어넣어주는 것처럼.


불안이 가득한 마음이 바로 진정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1년 동안 수도 없이 느꼈다. 복주병원 사람들이 환자를 대하는 그 고귀하고 존엄함 마음을. 그것은 아버지를 대하는 손짓, 몸짓, 눈빛, 얼굴빛으로 모두 알 수 있다. 지난 아버지 생신에는 우리의 면회 시간에 맞춰 처형이 직접 떡을 사서 보냈다. 평소의 아버지였으면 고마운 사람들에게 그렇게 마음을 전했을 분이고 아버지가 여전히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는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말이다. 나는 종종 처형의 어른스러움에 감동한다.


아버지의 재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엄마가 밥을 샀다. 나와 동생은 놔두라며 서로 사겠다고 얘기했는데 엄마가 아버지 카드를 내보였다.


-아버지 카드로 살 거야.


나와 동생은 엄마가 어떤 마음인지 알고 옥신각신을 멈췄다. 밥을 다 먹고 우린 같이 얘기했다.


-아빠. 잘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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